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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Review

[리뷰] 업 (Up, 2009)

업
픽사의 소속원들은 모두 천재일꺼라느니, 픽사네들은 대체 뭘 먹고 살길래 이런 영화들을 계속 만들어내냐라는 뻔한 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픽사는 역시 픽사니까 말입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모두가 거침없이 호평을 말하는 장면은 두말할 필요없이 칼과 엘리의 결혼부터 노년까지 이어지는 몽타주일 것입니다. 단 몇 장면만으로 칼과 엘리의 이야기와 칼이 홀로 고독하게 고집불통의 노인이 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 장면은 결혼 생활의 행복과 그 안에서의 시련, 그 시련의 극복, 그리고 배우자와 사별하는 아픔을 아무런 대사도 없이 그려내고 있는데, '넌 말이 없어 참 좋아.' 라는 이 몽타주 직전의 엘리의 대사가 불현듯 떠오르면서 픽사의 전작 "월-E"가 자연스레 떠오르기까지 합니다. 픽사가 원하는 그 것. 굳이 대사가 없이도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들겠다는 목표가 드러난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른 방향으로 보자면 칼과 엘리의 몽타주와 비슷한 장면은 "토이 스토리2"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사라 맥라클란의 "When She Loved Me"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그려지는 제시의 이야기가 그 것입니다. 두 장면의 공통점은 보는 이의 가슴을 더없이 아련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업"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아마도 수만개의 헬륨가스 풍선을 달고 하늘로 떠오르는 집이라는 만화적 상상력일 것입니다. 총천연색의 풍선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공중으로 집이 두둥실 떠오르는 장면은 가히 장관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러한 칼의 여행길의 시작 이전에 주목할 만한 부분은 그의 집과 그 주변입니다. 노년의 칼을 소개하는 장면에서 칼의 집은 재개발이 한창인 공사장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노년의 칼 자체가 괴팍한, 자신의 집에서 은거하는 노인이라는 설정을 위함도 있지만, 개발과 그 개발 속에서도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는 칼의 모습은 불연듯 무언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를 거대한 개발 앞에서 우리 주변의 수많은 추억이 깃든 장소와 물건, 누군가의 소중한 기억들이 어떻게 산산조각이 났는지는 우리는 알면서도 모른체하며 그저 수수방관해 오고 있습니다. 칼에게는 결국 양로원으로의 종용이라는 형태로 그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을 포기하라는 압력이 들어오게 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실에서는 칼이 자신의 집을 지킬 방도는 없습니다. 그래서 빌려온 것이 바로 수만개의 풍선, 그리고 그것을 이용한 집 띄우기라는 만화적 상상력입니다. 현실에서는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일이기에 말도 안되는 만화적 상상력이 동원이 되는 것입니다.  냉험한 현실의 벽을 크게 느낄 수록 풍선을 달고 하늘을 나는 집에 열광하게 됩니다.

만화적 상상력으로 두둥실 떠오른 집은 결국은 '중력'이라는 현실의 장애물이 제거된 결과물입니다. 하지만 영화 속의 집은 일정 높이에서 부유합니다. 중력이 적용되지 않는 이 풍선 단 집을 지상으로 당기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칼이 모험을 떠나기로 결심한 원인은 그의 사별한 아내 엘리의 소원입니다. 삶을 마무리하고 저 멀리 갈 ('Up' to Heaven) 칼을 이 세상에 붙드는 것은 파라다이스 폭포에 본부를 짓고 싶어했던 엘리의 소원, 그리고 그것을 이뤄주고자 하는 칼의 인생에서의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바람입니다.

하지만, 파라다이스 폭포를 향한 모험을 거듭해갈 수록 칼의 목표는 그에게 (그리고 같이 동행하는 러셀과 더그, 케빈에게까지) 시련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케빈의 집 바로 코 앞에서 석양이 지는 가운데 쓸쓸히 홀로 공중에 뜬 집을 끌고 가는 칼의 모습입니다. 아내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그의 어찌보면 낭만적인 꿈의 실현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변모하는 모습입니다. 그토록 갈망하던 소원을 이루었지만, 칼의 마음은 그 것이 끝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이제는 당신의 모험을 찾으세요.' 라는 엘리의 마지막 말이 기폭제가 되어 칼은 진짜 그의 모험을 향해 나아갑니다.

찰리 먼츠의 '모험의 정신' 호에서의 대결 중에 칼은 스스로의 결정으로 집(엘리, 그리고 엘리의 꿈)를 내려놓게 됩니다. 이제는 스스로의 모험을 찾기 위해. 그제서야 집은 중력의 힘을 받아 지상으로, 아래로 내려갑니다. 칼은 엘리를 떠나보냈지만 새로운 삶의 이유를 얻습니다. 러셀과 더그입니다. 영화 중간에 비춰지던 러셀의 가정사를 통해 드러난 러셀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것이 칼의 또다른 삶의 이유이자 목표입니다. 그리고 더그의 새로운 주인의 역할도 칼의 몫입니다. '모험'이 가져다 준 End가 아닌 And의 삶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들이 '모험의 정신' 호 아래에서 이야기를 주고 받는 장면을 통해 다시 한번 영화는 삶에서 (그것이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모험의 가치를 드러냅니다. '모험의 정신'이 있다면 끝이란 없다고 말입니다.

"업"을 통해 다시 한번 증명해보였지만 흥미로운 이야기와 주제를 풀어나가는 화법, 아름다운 화면들. 픽사는 두말 할 필요없이 거장입니다.

"업"을 통해 보이는 것은 "인크레더블" 이후 픽사의 확실한 행보입니다. "인크레더블" 이후 픽사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전통적 타겟층이던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아이들도 즐길만한 장면과 캐릭터가 있긴 하지만 영화의 주제는 어른들에게 더욱 할 말이 많습니다. 이러한 픽사의 변화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겠지만, 픽사의 팬인 어른으로써 왠지 더 만족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픽사의 최초 3D 상영 방식의 애니메이션인 "업"은 기존의 3D 상영 방식의 영화들이 추구하던 방향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기존 3D 상영 방식의 영화들이 3D라는 시각적인 효과를 보이려고(흔히 홍보 사진에 나오는 사람을 덮칠 듯이 튀어나오는 공룡 같은) 부단히 노력했다면, 픽사의 이 "업"은 그보다는 3D를 통한 자연스러운 입체감과 원근감을 표현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고 있는 듯합니다.  3D 상영의 효과가 홍보상의 그것과는 격차가 심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영화의 전체적인 모습으로 봤을 때, 픽사의 이런 모습은 최선의 방법이었다 생각하게 됩니다.

국내 상영본은 3D 디지털 자막이 없던지라, 일반 상영 자막과 3D 디지털 더빙을 모두 보았는데, 더빙이 그리 크게 이질감이 들지 않는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칼의 목소리를 연기한 이순재 씨는 그간의 이미지와 더불어 목소리까지 칼이라는 캐릭터에 훌륭하게 동화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다만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마지막 엘리의 메시지가 더빙 판에서는 따로 나레이션으로 흘러나오거나 하지를 않아서 일종의 옥의 티로 남았습니다.

더빙판도 만족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최고는 3D 디지털 자막인데, 이번 "업"도 그렇고 국내 극장가에서 약세를 면치 못하는 픽사 영화이기에 이런 불편함은 어쩔 수 없이 계속 감수해야 할 듯 해 너무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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