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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Review

[리뷰] 프로스트 vs 닉슨 (Frost/Nixon)

프로스트 vs 닉슨
"프로스트 vs 닉슨"은 언론이 해야만 하는 역할을 제시해주는 영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올바른 언론인의 모습에 대해 말하는 영화도 아닙니다. "프로스트 vs 닉슨"은 1977년 있었던 세기의 인터뷰를 통해 언론이 '할 수 있는 일'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의 제37대 대통령 리차드 닉슨이 대통력직을 사임합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자신이 행한 일을 인정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그가 헬기를 타고 백악관을 떠나는 모습을 중계한 방송은 큰 시청률을 기록했는데 그에 관심을 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영국 출신의 방송인인 데이빗 프로스트입니다. 그는 한때는 미국에서 TV쇼를 진행하며 잘 나가기도 했으나 이제는 영국과 호주에서 그저그런 쇼만 진행해나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는 닉슨의 인터뷰를 통해 주목받아 다시 재기를 꿈꾸려 합니다. '재기'. 이런 생각은 그만 한 것이 아닙니다. 프로스트의 인터뷰 제안을 받은 닉슨도 이를 자신의 정계 복귀 발판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대결을 앞둔 둘은 재기라는 점에서 같은 목표를 두고 맞붙게 됩니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프로스트는 우리가 흔히 이런 류 영화에서 생각할 수 있는 종류의 인물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런 종류는 진실을 밝히는 언론정의에 목숨을 거는 타입을 말합니다. 프로스트는 닉슨과의 인터뷰가 기록할 시청률이 우선은 가장 큰 관심입니다. 진실이란 시청자가 원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시청률을 나오게 할 수 있습니다. 보장된 시청률을 통해서야 광고를 따내 제작비를 충당하고 프로스트 자신이 다시 주목받을 수 있습니다. 그의 고민은 현실적입니다. 그런 프로스트가 인터뷰를 구상하게한 시발점인 시청률은 다른 의미로 대중적인 파급력을 뜻합니다. 흔히들 바보상자라고 부르는 TV는 그것이 제공하는 정보를 보는 이들이 믿게 하는 재주가 있으며, 그 보급은 동시다발적고 범위가 넓습니다. 닉슨도 그걸 주목한 것은 물론입니다. 총 네 차례로 계획된 인터뷰에서 세 번은 닉슨의 완승입니다. 심지어 닉슨에게 표를 던지지 않았던 스텝들도 그가 다시 나오면 표를 던지겠다고 말을 할 정도니 말입니다. 프로스트는 궁지에 몰립니다. 이 인터뷰란 그와 닉슨의 대결이고 승자는 오로지 단 한명 뿐입니다. '태양은 단 한사람에게만 비출 것이고, 다른 한사람은 암흑 속에서 잊혀질 것' 입니다. 모든 것을 건 프로스트는 마지막 인터뷰에서 닉슨을 궁지로 봅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누구도 듣지 못했던 말이 나오게 합니다. '내 실수요. 내가 정부시스템을 훼손했고, 나와 내 친구들, 그리고 국민들을 실망시켰소. 내 정치생명은 이제 끝이오.' 인터뷰 카메라는, 그리고 영화는 그 대답 후의 리차드 닉슨의 표정을 잡습니다. 그의 침통한 표정을. 영화는 이 장면을 TV의 가장 큰 죄악 혹은 속임수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인생 조차도 간략화시키고 요약시킵니다. 닉슨의 그 표정 하나에 미국인들이 듣고 싶었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시청자들에게, 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전달 됩니다.

"뷰티풀 마인드" 등을 통해 실화를 영화화하는데 재주를 보인 (그리고 나아가 아카데미의 입맛에도 맞춘) 론 하워드 감독은 "퀸"의 피터 모건의 각본에 더해 그런 자신의 솜씨를 선보입니다. 이번 영화는 일종의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극의 중간중간에 프로스트와 닉슨의 주변인물들의 인터뷰 형식을 취한 꼭지를 넣었습니다. 이러한 중간중간의 인터뷰는 극의 부가적인 상황을 효율적으로 정리해주고 때로는 전개과정에서 극을 유연하게 연결하는 역할을 하며 다큐멘터리 형식은 영화에 전체적으로 진실성을 강조해 줍니다. 영화는 이런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리면서도 적절히 극적인 상황을 유도하기도 하는데, 마지막 인터뷰 전날 프로스트에게 걸려온 닉슨의 전화를 통해서 인터뷰 자리에서 일종의 대결을 펼치는 두 사람에게서 동질성을 끄집어내기도 합니다. 그것을 통해 프로스트가 포기하고 싶던 상황에서 새로운 탈출구를 찾도록 유도합니다. 실화가 가진 힘과 적절한 극적상황의 덧붙임을 통해 영화는 주제와 흥미를 모두 잡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단연코 프로스트와 닉슨의 마지막 인터뷰일 것입니다. 한스 짐머의 스코어는 두 사람의 대결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닉슨을 연기해온 프랭크 란젤라가 설전 끝에 보이는 침묵과 그 눈빛, 눈동자의 움직임, 표정은 너무도 인상적입니다.

추가적으로 이 영화를 통해서 지금 시점에서 왜 닉슨인가? 라는 의문을 던져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 영화는 북미 쪽을 기준으로 하자면 부시의 퇴임을 앞둔 12월에 개봉한 영화입니다. 부시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한 닉슨보다도 못한 역대 최저수치의 지지율을 기록했습니다. 또한 많은 이들이 부시를 닉슨에 비유하며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영화에서는 닉슨 시기의 베트남전쟁과 캄보디아의 영상을 보여주며 '전쟁의 정당화 근거였던 베트남 내 공산군 사령부는 실제 존재하지도 않았다'라고 하는 장면이 부각되는데 이라크와 WMD를 상기한다면 이 영화와 부시의 관계에 대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영화 이면에 숨겨져있는 이러한 의미가 진짜 이 영화의 의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스터 부시에게. 당신이 지금은 닉슨이 헬기를 타고 그냥 떠났듯이 그렇게 텍사스로 가겠지만, 당신도 언젠가는 그 과오들을 인정하고 사과할 날이 올 것이오.'

영화가 끝이 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자연스레 우리의 현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아직 잘못을 사과는 물론 인정하지 않은 전직 대통령이 있습니다.

P.S 시사회를 통해 미리 접한 영화로, 국내에는 오는 3월 5일 개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