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Movie/Review

[리뷰] 왓치맨 (Watchmen, 2009)

그냥 이렇게 한번 생각해 봤다. '코믹북을 시작하는 방법으로 유명한 슈퍼히어로가 시체로 발견되게 해보자.' 미스테리가 풀려감으로써, 우리는 이 슈퍼히어로 세계의 진심에 점점 더 깊이 이끌려가게 된다. 그리고 현실과 일반 대중들에게 각인된 슈퍼히어로 이미지들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왓치맨
1986년 출판되어 슈퍼히어로 그래픽노블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왓치맨"의 시작에 대해 작가인 앨런 무어가 밝힌 내용입니다. 그가 만들어낸 1985년의 미국은 그간의 슈퍼히어로 그래픽노블에서는 볼 수 없는 그런 것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미국은 정부에 동조한 일부 슈퍼히어로의 도움으로 베트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닉슨은 헌법을 개정해 3선 대통령이 됩니다. 그런 미국에 맞서 그들을 경계하는 붉은 군대, 소련. 이 둘은 막강한 군비경쟁을 벌이게 되고 그로 인해 핵미사일로 인한 세계 제3차대전의 암운이 감도는 가운데, 세상은 절망과 타락의 악취와 그 고통에 취해 비틀댑니다.

그런 현실에서 슈퍼히어로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슈퍼히어로의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한 '킨' 법령으로 인해, 그들은 나이트 아울 II(이하 나이트 아울)나 실크 스펙터 II(이하 실크 스펙터) 처럼 은퇴를 하거나 닥터 맨하탄, 코메디언 처럼 정부의 편에서 그들을 돕거나, 로어셰크 처럼 자경단원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이 세계 속 슈퍼히어로들은 기존 슈퍼히어로들의 철저한 비꼬기입니다. 닥터 맨하튼을 '슈퍼맨' 혹은 '신'이라고 칭하는 모습이나 자신의 집 지하에 부엉이 우주선 아치를 숨겨두고 있는 나이트 아울이 곧 배트맨이라는 것 등을 통해 그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신과 같은 슈퍼맨은 로이스 레인이 사라지자 인간들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화성으로 떠나버리며, 몸에 비계가 붙은 은퇴한 배트맨은 여자 앞에서 움츠러듭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만화 책 속에서 정의를 부르짖으며 호쾌하게 악당들을 때려눕히는 멋드러진 모습이 아닌. 그러던 중 그들중 한명인 코메디언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고, 그것에 의심을 품은 로어셰크가 과거의 동료들과 접촉을 시작합니다.

'Who watches the watchmen?' '감시자들은 과연 누가 감시할 것인가?' 평화와 정의를 지켜주려 나섰다는 그 슈퍼히어로들은 과연 올바른 것인가? 그들의 옳고 그름은 과연 누가 판단할 것인가? 자신들이 지켜야한다고 믿는 정의와 평화에 사로잡힌 그들은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버리고 맙니다.

그래픽노블이 출간된 이후, 헐리우드는 바로 이 작품의 영화화에 관심을 보입니다. 처음 20세기 폭스에서 시작이 된 프로젝트는 후에 워너를 거쳐 유니버셜, 파라마운트, 그리고 다시 워너로 돌아갑니다. 그 여정에서 많은 감독과 작가들이 이 프로젝트에 손을 댑니다. 테리 길리엄은 '이 프로젝트는 영화보다는 5시간짜리 미니시리즈로 만드는게 옳다'며 프로젝트를 떠나고, 대런 애로노프스키, 폴 그린그래스 등이 한때 감독직에 내정되기도 합니다.


2006년 6월, 워너는 "300"의 잭 스나이더가 "왓치맨"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고 발표합니다. 잭 스나이더는 제안을 받고 2주간 감독직을 수락할지에 대해 고민했는데, 결국 자신이 안하면 또 다른 누가 이 작품을 망칠 것이라는 생각에 제안을 수락했다고 합니다. 각본을 맡은 알렉스 티세는 이전 데이빗 헤이터의 두 각본에서 최고의 요소들을 뽑아내어 기존의 현대배경이 아닌 원작처럼 배경을 냉전시대로 설정합니다. 잭 스나이더는 결말의 음모를 단순화시킨 헤이터의 각본들 중 하나의 엔딩을 유지하고자 했는데, 그를 통해서 캐릭터를 소개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잭 스나이더는 "300" 때와 마찬가지로, 원작을 스토리보드 삼아 주석을 달아가며 영상으로 옮기기 위해 노력합니다. 감독 자신이 원작의 팬보이이기에 그는 원작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으려고 마음 먹습니다. 비록, 앨런 무어가
'나는 결코 그 영화를 보러 가지 않을 것이다. 내 책은 코믹 북이다. 영화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다. 코믹북이 가장 올바른 표현 방식이고, 그것을 통해 읽혀지게 만들었다. 안락의자에 앉아 난로가 옆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곁들여 마시면서 말이다' 라고 말하며, 심지어 이 영화의 크레딧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하고 일체의 저작권료를 받지 않겠다고 했더라도 말입니다. 거기다 무어가 "300"을 보지는 않았지만, 들은 바를 통해서 잭 스나이더의 그 영화는 인종차별적이고, 호모포비아적인 성향을 띄는 등 스나이더의 작품에 문제가 많다고 비난했더라도.

앨런 무어

잭 스나이더가 만들어낸 영화 "왓치맨"은 원작에서 대한 무한한 헌사의 산물입니다. 영화는 원작 그래픽노블이 보여주던 세계보다 훨씬 더 어두운 색조를 유지합니다. 그러면서 영화의 스토리라인을 그대로 따라나갑니다. 물론, 방대하고 복잡한 원작을 그대로 표현해기는 애초부터 무리입니다. 잭 스나이더는 1세대 슈퍼히어로들의 삶을 영화의 오프닝 부분에서 간략하게 설명해주는 방식을 차용하는데, 이 방법은 상당히 유용했습니다. 원작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설명하면서, 앞으로의 런닝타임의 제약도 어느정도 해소합니다. 잭 스나이더는 원작이 주는 의미와 방식을 최대한 유지해나가며, 원작의 디테일과 그 상징적인 의미들을 구현해내는데 그 모든 촛점을 맞춥니다. 그는 자신을 원작의 숨은 상징(easter eggs)를 지키는 문지기라고까지 칭합니다. 그렇다보니 당연히 일반적인 대중성과는 담을 쌓습니다. 어차피 열혈 팬보이들에게는 잘만드나 못만드나 비난 받을 것이 뻔함에도 대중과의 괴리를 선택하고, 자신의 소신을 밀어붙인 잭 스나이더의 선택은 놀라움을 자아내기까지 합니다. 대중을 향해 손을 뻗는 일은 포기했지만, 그럼에도 영화가 택한 최소한의 연결선을 유지하기 위한 선택은 단호했습니다. 일부 서브플롯의 제거가 그것입니다. 원작에는 영화에서도 등장하는 신문가판대의 남자와 그 옆의 소년. 그리고 그 소년이 읽는 만화책인 '검은 화물선 이야기'가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 같이 삽입되어 전개됩니다. 난파를 당하고 혼자 살아남은 한 선원은 죽음을 부르는 검은 화물선이 자신의 마을로 향하는 것을 보고는 보통 때라면 하지 못할 끔찍한 행동과 거친 상어(shark)의 공격도 물리치고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뭍에 도착합니다. 마을에 들어선 그 선원은 공포와 두려움에 눌려 깨닫지 못한 놀라운 현실의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 '검은 화물선 이야기'는 이야기 속 이야기로 슈퍼히어로들의 현재의 심리상태와 그들이 행하고 있는 행동을 투영해 보여줍니다. 따라서 그만큼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영화에 직접적으로 포함되었다면? 이 영화는 두 단어의 조합이 어색한 블럭버스터 컬트 영화로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아니, 대체 분간할 수 없는 이야기 구조를 가진 난잡한 영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픽노블이 가질 수 있는 성취와 영화가 표현해내고 보여줄 수 있는 그 한계를 정확히 판단한 결과입니다. '검은 화물선 이야기'가 빠진 것은 물론 아쉬운 일이지만, 그 선택은 옳았습니다.

이 영화에는 잭 스나이더가 자랑하는 매끈하고, 때로는 스타일리쉬한 영상미는 있을지언정 이런 류 블럭버스터의 미덕이라고 여길 수 있는 화려한 액션이나 정의의 가치 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원작의 충실한 구현이 모토인 이 영화는 애초에 그런 것에는 관심 조차 없었습니다. 'It's a joke. It's a all a joke.' 코메디언의 대사와 같은, 원작처럼 영화는 지독하고 쓰린, 그래서 그냥 넘기기 힘든 농담입니다. 그 농담은 나이트 아울과 실크 스펙터의 정사씬에서 흘러나오는 "할렐루야"의 비꼬기처럼 웃음을 주기도 합니다만, 그 쓰라림은 어디가지 않습니다. 그 농담이 감춘 마지막 진실의 모습에서 우리가 생각하고 정의내리는 평화와 선, 정의에 대한 개념이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립니다. 영화가 비록 간결성을 위해 원작과는 다른 방식으로 마지막에 일어나는 파국을 표현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코 그 주제와 메세지는 흐릿해지지 않습니다.

영화는 마무리에서 원작과 다르게 관객에게 직접 물음으로써, 쐐기를 박습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당신도 이게 옳다고 생각하잖아."(마지막에 도시를 비추는 장면에서 건물 옥상의 광고판을 주목.) 과연 이것이 옳은가? 아니면 그렇지 못한가? 에 대한 고민이 싹튼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규정하고 있는 선악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다시 한번 여실히 드러내줍니다.

원작을 이 정도로 다른 누군가가 만들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은 부정적입니다. 영화 "왓치맨"은 결코 친절한 영화가 아닙니다. 기분 나쁘고 재수 없으며 그렇기에 끔찍한 농담입니다. 하지만, 부정하기 어려운 진실입니다. 그 진실을 잭 스나이더는 온전히 담아냈습니다.

P.S "다크 나이트"가 없었다면, 과연 잭 스나이더가 영화를 이렇게 만들 수 있게 워너가 승인을 해줬을지는 말그대로 의문입니다. "다크 나이트"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