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의 신작 영화 "베를린"을 전야 상영을 통해 감상했습니다. 평소 좋아하던 감독인지라, 그의 신작을 빨리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상당히 잘 뽑혔습니다. 재미있는 오락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머리에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했던 무엇. 톰 롭 스미스의 2008년 작 소설 "차일드 44"가 그것입니다. 국내에는 한때 절판되었다가 다시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소설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스탈린 치하 러시아 비밀경찰인 MGA (KGB의 전신)의 유능한 요원인 레오는 2차 세계대전의 전쟁 영웅출신으로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다하는 인물. 그러나 자신의 임무와 가족에 대한 깊은 갈등 끝에 부하 바실리의 음모로 민병대로 좌천된다. 그러나 좌천된 후 알게된 한 아동 살인사건을 계기로 사건의 연쇄성과 중요성을 깨달은 뒤, 아내 라이사와 함께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걸고 고군분투하게 된다.
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이유는 영화 "베를린"의 주요인물들과 사건들이 소설 "차일드 44"의 2/5 지점 혹은 전체 분량의 절반 가량의 이야기와 동일 혹은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아래 발췌한 부분에 대한 모든 권한은 해당 책을 출판한 "노블마인" 및 "차일드 44"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아래는 상업적 용도가 아닌 영화와 소설의 유사성을 말하기 위한 용도로만 사용되었습니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소설의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소설을 읽지 않으실 분은 상관이 없겠지만, 읽을 예정이실 분들은 피해주십시오.
레오는 눈부신 활약으로 수보르프 2등급 훈장을 받았다. 냉철한 분별력, 군에서 올린 뛰어난 성과, 준수한 용모와 무엇보다도 국가에 대한 절대적이고 굳건한 믿음 덕분에 그는 독일군이 점령한 영토를 해방시킨 소비에트 해방군을 대표하는 모델이 됐다. (중략) 프라우다소련 공산당 중앙기관지 1면에 그 사진이 실린 일주일 후 레오는 승리의 상징이 된 그와 악수하거나 포옹하고 싶어 안달하는 낯선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축하를 받았다. (레오의 출신 배경에 대한 설명입니다.)
테이블을 박살내고, 침대를 뒤집고 매트리스를 갈가리 찢고, 베게도 무참히 찢어발기고,바닥 널을 뜯어내면서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아직까지 아나톨리 브로츠키의 아파트에서는 그의 소재를 알려줄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 (중략) 브로츠키는 배울 만큼 배운 인텔리에, 영어도 좀 하는 데다 외국인들을 만날 일이 많았다. (중략) 따지고 들면 전공이 수의과라서 의사로서의 자격은 없지만 몇몇 야전병원에서 일하면서 훈장을 두번이나 받았다. 이 용의자는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한 영웅인 것이다. (중략) 그 당시 싹튼 일종의 전우애에 발목을 잡힌 것이다. (아나톨리 브로츠키는 이경영 캐릭터에 모티브를 제시한 캐릭터로 보입니다.)
가장 믿음이 가는 사람이 가장 의심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 쿠즈민은 스탈린의 유명한 잠언을 인용했다. 믿되 조사하라. 스탈린의 이 말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믿는 이들을 조사하라. 믿음직스러운 사람이나 의심스런 사람이나 똑같이 철저하게 조사하기 때문에 일종의 평등이 존재한다는 논리다. 조사관의 의무는 유죄가 드러날 때까지 결백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캐는 것이다.
그는 이름과 주소와 누군가 그들을 의심한다는 점만 가지고 수많은 시민들을 체포했다. 용의자의 유죄는 그 사람이 용의자가 되는 바로 그 순간 결정된다. 증거는 어차피 조사 할 때나 필요했다.
레오보다 다섯살 많은 서른 다섯살의 바실리는 한때 MGB 내에서 가장 전도유망한 간부였다. (중략) 레오는 그런 충성심이 애국심보다는 사리사욕에서 비롯됐을 것이라고 남몰래 생각했다. 과거에 바실리는 하나밖에 없는 친형이 반스탈린 발언을 했다고 고발하여 조사관으로서의 충성심을 입증해 보였다. (중략) 레오는 더 이상 고발할 형제도 없는 이 부관이 예전의 권력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동명수 캐릭터(류승범 분)에 상응하는 캐릭터가 소설 속에서는 바실리 입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레오를 추적합니다.)
이런 고도의 첩보사건을 실패하게 되면 레오가 의도적으로 조사를 망쳤다는 주장이 제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거기에 용의자까지 잡지 못하면 한층 더 깊이 진창에 말려들게 될 것이고, 그의 충성심 또한 의심받게 될 것이다. 믿는 이들을 조사하라. 아무도 이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 법칙을 집행하는 당사자 마저도.
그는 주사기에 짙은 노란색 오일을 가득 채우더니 그것을 쇠 쟁반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죄수의 셔츠를 잘라 내고는 파란 혈관을 찾기 위해 팔 위쪽에 고무 지혈대를 맸다. (중략) "내게 의학적 지식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할지 설명해주지. 나는 너의 혈류에 장뇌를 주사할 거야. 그게 어떤 작용을 할지 알고 있나?" "이것도 사람을 도울 수 있어. 미친 놈들을 도와줄 수 있지. 이게 네 몸속에 들어가면 발작이 일어나게 돼. 그렇게 되면 거짓말을 할 수 없어.오직 진실만을 말하게 되지." (중략) 효과가 나타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갑자기 아나톨리의 눈에 모든 의식이 사라졌다. 눈동자가 말렸고,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1천 볼트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직 팔에 바늘이 꽂혀 있었고 몸에 주입된 오일은 얼마 되지 않았다.
"저는 그 말을 기록으로 남길 준비가 됐습니다. 당신이 나와 동침한다면." 그녀는 심지어 눈 하나도 깜작하지 않았고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침착한 반응에 그녀에 대한 욕망이 점점 더 커져갔다. (중략) 그녀의 침묵을 긍정적으로 해석한 자루빈이 그녀를 향해 걸어가면서 시험삼아 그녀의 다리에 손을 댔다.
레오는 봉투를 찢어서 몇 장의 커다란 흑백 사진을 꺼냈다. 거리 맞은편에서 거리를 두고 찍은 감시 사진이었다. 그 사진에는 라이사가 찍혀 있었다.
발이 얼어 감각이 없어지고 있었는데 마침내 움직이게 되어 기뻐하면서 레오는 50미터 쯤 떨어진 곳에서 아내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중략) 이 역은 프라우다지가 종종 자랑했던 것처럼 세계 최고이자 가장 혼잡한 역으로 매일 수십만 명이 이용하고 있는 곳이다. 지하철 역 입구에 도착한 레오는 돌계단을 내려와 아래층 홀로 내려갔다. (중략) 라이사가 집으로 가는 중이라면 북쪽으로가는 자모스크보레츠카야 선을 타고 테아트랄나야 역에서 갈아타야했다. (중략) 라이사가 머리를 살짝 돌리기만 해도 둘은 눈이 마주칠 것이다. 그는 분명 그녀의 시야 주변에 들어와 있었다.
"어제 라이사를 고발하라는 요구를 받았어요. 상사들이 라이사가 반역자라고 믿고 있어요. 라이사가 외국 정부기관을 위해 일하는 스파이라고 하더군요. 저보고 조사하라고 했어요." (중략) 노크 소리가 들렸다. 스테판이 문을 열고 라이사를 안으로 들였다. 그녀는 그의 부모처럼 레오를 보고 놀랐다. 스테판이 설명했다. (중략) "사실은 아냐. 대개는 퇴근하고 곧장 여기로 오는데, 오늘 밤엔 약속이 있어서 조금 늦었어." "약속?" "의사를 보러." 라이사의 미소가 커지기 시작했다. (중략) 라이사가 말을 이었다. "아이가 생겼어요." (라이사는 그녀를 의심한다는 남편의 말을 우연히 듣게 되고는 자신이 임신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레오는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는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아내의 느린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레오의 허리에 등을 기대고 있었는데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우연히 그렇게 됐다. 아내는 잠을 깊게 자지 못했다. 그걸로 그녀를 고발할 충분한 이유가 될까? 레오는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세벽 네 시, 체포의 시각. 자고 있는 사람들을 낚아채기에 최상의 시간이다. 이 시간에 들이닥치면 사람들은 무기력하고 혼란스러워한다. 요원들이 집으로 때를 지어 쳐들어가는 그 와중에 용의자들이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들이 조사받을때 종종 불리하게 사용된다.
레오는 여러 채의 아파트와 사무실의 수색을 조직과 감독한 경험이 있다. MGB에서 근무하는 요원들은 경쟁적으로 이런 수색 작업을 실시했다. 자신의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요원들이 보여준 놀랄 만큼 철저한 수색 작업에 대한 이야기들이 요원들 사이에 오갔다. 귀중품을 부수고, 초상화와 예술작품을 액자에서 꺼내고, 여러 권의 책을 찢고 벽 전체를 부셨다. 여기는 레오의 집이고, 이 물건들은 그의 물건들이었지만 이번 수색 역시 다른 작업과 다를 바 없이 똑같이 처리해야 했다. 레오는 침대보와 배갯잇과 이불을 찢고, 매트리스를 뒤집어서 장님이 점자들 읽는 것처럼 꼼꼼하게 매트리스의 구석구석을 만져보았다. 종이 문서 같은 것을 매트리스 안에 넣고 꿰메서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다. (중략) 그는 부엌에서 스크루드라이버를 가져와서 마루청 하나하나를 다 뜯어냈다.
바닥에 무더기로 쌓인 옷을 본 바실리는 허리를 구부리더니 라이사의 속옷을 하나 집어들었다. 그는 손가락 사이에 속옷을 집어 넣어서 돌돌 뭉쳐서 냄새를 맡으며 레오를 뚫어져라 보았다. 이런 그의 도발에 열불을 내는 대신 레오는 전에는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면에서 부관에 대해 생각했다. 이렇게 그를 증오하는 바실리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영화에서는 동명수 캐릭터가 똑같은 행동을 합니다.)
이불보를 들어 올리자 작은 물건 하나가 그의 발을 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레오는 허리를 숙여서 그것을 집었다. 구리 루블 동전이었다. 그는 그 동전을 침대 옆에 있는 캐비닛 위로 던져졌다. 동전은 떨어지면서 반으로 갈라져 쪼개진 반쪽 두 개가 캐비닛 반대편으로 굴러갔다. 어리둥절해진 레오가 캐비닛으로 다가갔다. 그는 무릎을 구부리고 그 동전 반쪽 두 개를 다시 가져왔다. 한쪽 안은 속이 비어 있었다. 둘을 합치자 보통 동전 같아 보였다. 레오는 전에도 이런걸 본 적이 있었다. 이것은 마이크로필름을 몰래 운반하는 장치였다. (영화에서는 동명수가 숨긴 것으로 나옵니다만, 소설에서는 부인인 라이사가 과거 어려웠던 시절 생존을 위해 가지고 다니던 물건으로 후반부에 밝혀집니다.)
레오는 눈을 떴다. 손전등 불빛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몇 시인지 새삼 확인할 필요도 없다. 지금은 체포의 시간, 새벽 네 시다.
아파트로 가는 길에 , 14층 층계참에서 라이사를 유죄로 만들 수 있는 속이 텅 빈 동전을 아직까지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는 기억이 난 레오는 그 동전을 꺼내서 던져버렸다. 어쩌면 바실리가 그 동전을 몰래 숨겨놨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중요한 건 스탈린이 죽었다는 것이다. 서열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과 확신은 사라져버렸다. 누가 그의 뒤를 이을 것인가? 국정 운영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까? 누가 새 정권의 환심을 사고 누가 떨려날 것인가? 스탈린 정권에서는 허용됐던 일이 새 정권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지도자의 부재는 잠정적으로 국정이 마비된다는 것을 뜻한다. (스탈린의 사망으로 인해 정국의 혼란이 일고, 그로 인해 레오는 목숨을 부지하게 됩니다.영화는 김정일-김정은 체제로의 이행중인 지금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 프라우다지 1면에 기사가 실린 남자를 어떤 증거도 없이 기소한다는 것은 위험하게 보일 수 있다.
"임신한게 아니었어?" "내가 홀몸이었더라도 당신이 내 편을 들어줬을까? "그걸 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야?" "당신의 마음이 변할까 봐 두려웠어." 그들의 관계가 일순간에 드러났다.
바실리는 레오가 서방으로 도주하려 한다는 추측을 믿지 않았다. 그가 모스크바로 돌아올까? 그의 부모님은 이곳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부모님은 이곳에 살고 있다.
장르적 클리셰로 치부하고 넘길 수 없는, 극의 주요 등장 인물의 성격과 배경은 물론이고, 사건을 발생시키고 전개 시키는 모티브가 되는 요건이 동일합니다. 그로 인해 유사한 설정까지 의혹을 자아냅니다. 이 영화, 각본은 류승완 감독으로 크레딧에 올라가 있습니다.
결국은 보는 관객의 판단이겠지만, 씁쓸함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를 좋아했었기에 더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