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터 vs 에이리언
드림웍스는 "몬스터 vs 에이리언"과 관련, 'Intru 3D'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런 강조의 일환으로 슈퍼볼 광고에서는 3D 예고편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드림웍스는 인텔과 합작해 만든 새로운 3D 기술인 이 'Intru 3D'는 기존 3D 영상보다도 더 나은 효과를 보여준다고 큰소리입니다.

그런 영상에 대한 믿음이 너무 컸던 걸까요? 전체 영화는 새로운 기술을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만만에 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실망스럽습니다. 영화 "몬스터 vs 에이리언"은 흔히 말하는 B급 SF 괴수물들에 나오는 캐릭터들이 팀으로 등장합니다. 미친 과학자(그로 인해 바퀴벌레 인간이 되고 만) 닥터 로치, 물고기 인간 미씽 링크, 젤리 몬스터 B.O.B, 핵실험으로 태어난 거대해진 애벌레, 그리고 결혼식날 운석을 맞고 거대해져버린 수잔. 영화는 이 몬스터 팀이 지구를 침략하는 외계인 갤럭사를 상대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지나치리만큼 평이합니다. 단조로운 이야기는 물론이고 각종 기존 영화들 속 몬스터를 차용해 영화 속에 등장시키고 있지만, 예상 가능한 수준에서만 그 캐릭터들을 사용하는데 그칩니다.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의 특징이기도 한 유명 배우들의 성우 캐스팅은 이번 영화에서는 이런 단점을 보완해주려는 역할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배우들의 목소리도 각각의 캐릭터들의 개성이나 존재감을 표현해주지는 못합니다. 아, B.O.B 역을 연기한 세스 로건만은 확연히 눈에 들어옵니다. 오직 그만이 제대로 된 몫을 해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드림웍스의 장기인 패러디나 유머는 이 영화에서도 여전하긴 하지만 그 재미는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사실 이번 영화의 그런 코드가 약한 것인지, 아니면 그간의 드림웍스의 그런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않은 모습에서 신물이 난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찌됐든 그런 유머코드를 강점으로 내세우는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이기에 결과적으로 실패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만약 문제가 후자라면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자체의 문제이기에 그 심각성은 더 클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도 물론 좋지만, 그 기술과 접목해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좋은 컨텐츠가 아쉽습니다.

P.S 유독 이 영화의 디지털 3D 상영만은 자막보기가 난감하더군요.


번 애프터 리딩
영화 "번 애프터 리딩"은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으로 간단명료하게 설명되는 영화입니다. 저기 우주 밖에서 누군가를 바라보던 시선이 점차 지구로 다가와 CIA 본부로,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그와 반대로 지구 밖으로 나갑니다. 이게 끝입니다.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코엔 형제의 첩보물의 옷을 입은 이 블랙 코메디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한 CD입니다. 그 CD에는 CIA에서 (자기 생각으로는) 정치적 보복을 당해 쫓겨난 오스본(존 말코비치 분)이 회고록을 작성하다 만든 파일이 담겨있습다. CD는 오스본의 아내인 케이티(틸다 스윈튼 분)가 그와의 이혼 준비를 위해 변호사의 조언대로 오스본의 컴퓨터를 뒤져서 만든 것으로 우연찮은 실수로 그 CD는 한 헬스클럽에서 발견됩니다. 헬스클럽 트레이너인 채드(브래드 피트 분)는 그것을 보고는 CIA의 비밀정보라고 굳게 믿고, 마침 성형수술을 할 비용이 필요했던 노처녀 헬스장 직원 린다(프란시스 맥도먼드 분)는 그것을 이용, CD의 주인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려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관계 속에 한다리 씩 걸치고 있는 바람둥이 연방경찰 해리(조지 클루니 분)가 있습니다.

CD 하나를 두고 이 등장인물들 사이에는 각종 사건들이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전개가 됩니다. 절묘하게 짜여진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이 애초에 원래 하려했던 것이 무엇이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체 휘둘립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하나 있으니, CIA입니다. CIA 본부의 간부(J.K. 시몬스 분)는 이러한 모든 상황들을 부하 요원에게 보고받고는 한마디 던집니다. '이후에 말이 되면 다시 보고하게.' 대체 이 말도 안되는 일들을 불러온 그 CD란 녀석은 대체 무엇일까요? 채드나 린다는 그것을 굉장한 기밀정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 정보는 말그대로 별 것 아닌 정보입니다. CD 하나를 두고 살인까지 벌어졌지만 결과적으로 CD의 가치가 0으로 수렴함이 (적어도 관객들에게는) 만천하에 드러났고, 그러함에도 여전히 상황은 꼬이고 또 꼬여만 갑니다. "파고"의 돈가방처럼 CD는 철저한 맥거핀으로, 시선을 잡아두기는 하지만 정작 이야기의 주체는 아닙니다. 그 아무것도 아닌 CD 하나로 벌어진 이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러운 상황은 우리네 삶의 또다른 축소판입니다. 그게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던 CIA간부와 부하요원은 말합니다. '우리가 이번 일을 통해 무엇을 배웠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도 그래, 다시는 이런 일에 엮이지 말게.' 정작 모든 것을 지켜본 그들조차 이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시선은 처음에 말한 것처럼 지구 밖으로 물러나갑니다. 말그대로 전지적작가 시점의 이 모습 속에서 영화 내내 오스본이 외쳐 되던 '저능아 녀석들!'(moron)이란 말이 왠지 모르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이 신과 같은 시점에서 보면 넓디 넓은 우주 한 구석의 지구, 그리고 또 그 별의 어느 귀퉁이에 벌어지는 이런 일들은 무의미한 일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시선은 그 안에서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보며, 'moron'이라고 외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왓치맨"의 닥터 맨하튼처럼 그저 개미들 노니는 모습에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이 더 가까울 것입니다. 코엔 형제의 이 시니컬함은 킥킥 대는 웃음과 함께 싸한 기운을 불럽냅니다. 더불어 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제목조차도 읽고 바로 태워버리라는 비밀문서를 뜻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문서 자체가 별 의미가 없는.)를 더없이 흥미있고, 스릴넘치게 그려내는 코엔 형제의 연출력은 입 아픈 소리지만, 말 그대로 명불허전입니다. 대체 그 사람들은 뭘 먹고 살길래 이런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답니까?


그림자 살인
해외 영화들에서는 탐정이 등장하는 모습을 흔히 접할 수 있지만, 우리 영화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설령 탐정 비슷한 캐릭터가 등장하더라도 그 캐릭터는 조연, 혹은 단역으로 영화의 겉을 맴돌 뿐 입니다. 영화 "그림자 살인"은 그간의 한국영화들과는 달리 탐정을 영화의 중심에 놓은 영화입니다. 우리 영화에서는 왜 탐정이 비중있게 그려지지 않았을까요? 너무도 유명한 '셜록 홈즈' 등이 그러하듯이 그 존재들은 우리가 아닌 해외의 존재들이다보니 우리나라라는 배경에서 그런 '탐정'이 등장하는게 낯익은 모습이 아니기 때문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그 낯설은 모습은 소설 등의 분야에서부터 탐정을 다루는 모습이 쉽게 등장하지 않았기에 더욱 커졌을테고 말입니다. (우리나라 장르 영화/소설의 그 토대 자체가 취약해서 정도일까요?)

"그림자 살인"은  탐정과 그가 겪게되는 사건들을 대한제국 말기라는 시대에 풀어놓습니다. 그 시기는 각종 서구의 새로운 문물과 이기들이 우리에게 소개되는 때로, 신문물의 새로운 등장으로 인한 새로움과 혼란의 시기에 등장하는 탐정이란 직업의 캐릭터는 다른 어느 시기에서보다 우리나라에서의 그의 존재를 자연스레 수긍케 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홍진호'(황정민 분)라는 탐정 캐릭터는 우리가 인식하고 있던 기존 서구의 탐정 캐릭터들이 혼재해 있습니다. 마치 그 시대 배경처럼. 장광수(류덕환 분)를 처음 만날때 단박에 그가 의사임을 알아채는 모습은 셜록 홈즈의 그것이고, 그의 전체적의 탐정 활동 모습은 "차이나타운"에서 잭 니콜슨이 연기했던 J.J. 기티스의 그것입니다. 거기에 더해진 것이 황정민이란 배우에게 어울리는 웃음기 머금은 능글맞음입니다. 이런 혼합된 캐릭터는 다른 캐릭터나 영화의 일부 장면에서도 그대로 느껴집니다. 의대생인 장광수는 군의관이었던 셜록 홈즈의 단짝 왓슨 박사를, 홍진호에게 망원경 등의 도구를 제공해주는 박순덕(엄지원 분)은 "007" 시리즈의 Q를 연상케하고 골목과 건물 지붕을 넘나드는 추격장면은 "본 얼티메이텀"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을 구한말이라는 우리의 시대 배경에 접목시킨 모습은 생각 외로 자연스럽고 뿐만 아니라 흥미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탐정 스릴러'라는 장르적 측면에서는 맥이 빠집니다. 영화는 고위관료 아들이 실종이 되고, 그 아들의 시신을 우연찮게 발견한 의학도 장광수가 자신이 혐의를 뒤집어쓸까봐 진짜 범인을 찾아달라고 홍진호에게 의뢰를 하며 시작합니다. 홍진호가 하는 일이라고는 기껏에야 떼인 돈 받아주기, 바람피는 마누라 뒷조사하는게 전부인 마당에, 그는 대번에 장광수의 의뢰를 거절합니다. 하지만 돈과 장광수의 설득으로 그는 사건조사에 나섭니다. 영화는 이른 시점에서 범인의 정체를 관객에게 들어내면서 홍진호가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관객에게 함께 추리하며, 머리를 쓰는 재미를 앗아갑니다. 그러면서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관객이 몰입하며 흥미를 느낄 요소가 사라집니다. 결국 영화는 범인의 정체가 결과적으로는 착각과도 같은, 그로 인한 속임수 같았다는 것을 관객에게 강요합니다. 또한 홍진호라는 주인공 캐릭터는 분명 매력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그 외 다른 인물들의 묘사와 행동은 실망스럽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순덕입니다. 순덕은 영화에서 Q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도 또한 다른데, Q가 초반에 등장해 이펙트를 남기고 사라진다면 순덕은 초반 이후 홍진호와의 과거 관계 암시를 위한 용도로만 집중적으로 사용되면서 영화 상에서 애매한 위치를 고수합니다. 지나치게 베일에 쌓인 둘의 관계는 흥미를 불러일으킬만큼 깊어지지도, 그렇다고 사건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도 되지 않으며 서브 플롯으로의 역할을 자임하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셜록 홈즈와 왓슨의 관계를 염두해 두고 만들었을 것으로 보이는 장광수는 비록 홍진호에게 사건을 쥐어주는 역할을 하며 그와 자주 어울리긴 하지만, 중요한 상황에서는 철저하게 사건 외부의 인물로 작용합니다. 왓슨도 결국 사건 자체에 하는 일이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는 이야기의 서술자라는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급격하게 축소되는 장광수 캐릭터와 같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아쉬운 점이 존재하긴 하지만, 저는 이 영화가 나름 마음에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는 좋았던 것은 이 영화의 이야기와 캐릭터가 결코 시대에 억눌리거나, 그로 인해 함몰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장 근래의 예는 낭만의 화신이 사랑 때문에 독립의 화신으로 변모하고, 남은 것은 CG로 만든 화려한 경성 시가지의 모습 밖에 없었던 "모던 보이" 일 것입니다. (같은 해에 개봉한 "라듸오 데이즈"나 "원스 어폰 어 타임"도 마찬가지.) 홍진호의 어두운 뒷모습에 드리워진 것은 결코 시대의 아픔이나 무게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뒷모습에서 본 것은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으로 얼룩진 비극을 목도한 한 남자의 슬픔이었습니다. 주연인 황정민이 인터뷰에서 밝히는 바도 그렇고, 애초에 이 영화는 시리즈 물로 기획된 것 같습니다. 단순히 이 한 편의 영화로 봤을 때는 실망스러웠던 순덕과 홍진호, 그리고 홍진호의 과거에 대한 암시가 효과를 보일 시퀄, 혹은 프리퀄의 제작을 바라봅니다. 아쉬움 속에서도 황정민이 연기한 탐정 홍진호 캐릭터의 매력은 빛을 잃지 않았습니다.

용의자 X의 헌신
영화 "용의자 X의 헌신"은 국내에서도 유명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의 인기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입니다. 일단 원작은 소설이긴 합니다만, 캐릭터나 전체적인 틀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집 "탐정 갈릴레오"를 바탕으로 드라마 화되어 인기를 모은 "갈릴레오"에 그 기반을 둔 듯합니다. (왜 둔 듯 하다라고 하냐면, 제가 "갈릴레오"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판 "하얀 거탑"의 연출자로 알려진 니시타니 히로시가 드라마 "갈릴레오"의 연출에 이어 "용의자 X의 헌신" 영화판의 연출도 맡았을 뿐만 아니라, 드라마에서 유카와 역을 맡았던 후쿠야마 마사하루, 우츠미 역의 시바사키 코우, 쿠사나기 역의 키타무라 카즈키가 영화에서 그대로 등장합니다.

원작과 영화는 자신을 끈질기게 찾아내 괴롭히던 전 남편을 우발적으로 살해한 야스코와 그녀의 옆집에서 살다 그 살인 사건을 알고는 철저한 계획을 세워 그녀를 보호하게 되는 재야의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 그리고 또 다른 천재가 등장해 이시가미의 계획을 간파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야스코를 의심하며 사건을 조사하던 쿠사나기 형사는 풀리지 않는 사건으로 인해 대학 동창이기도 한 천재 물리학자 유카와에게 이 사건을 이야기하고 천재는 천재를 알아본다고, 대학 시절 안면이 있던 이시가미의 존재가 그 사건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유카와는 사건에 관심을 보이고는 조사에 들어갑니다.

이 영화의 대한 느낌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다분히 일본 드라마스럽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가까운 느낌은 역시나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화되었던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PiFan에서만 선보이고 국내개봉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없는)입니다. 원작과는 다르게 주인공 캐릭터를 여자(다케우치 유코)로 바꾼 영화는 연속적인 수술 실패로 인한 환자의 사망과 그를 둘러싼 의혹을 다룬 스릴러 영화라기보다는 그저 병원을 배경으로 한 가벼운 의학드라마라는 인상이 강합니다. 영화 "용의자 X의 헌신"도 그러한데, 드라마에서 그대로 이어진 듯한(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드라마를 못 봤기 때문에) 괴짜스러운 면으로 코믹스러움을 자아내는 유카와의 캐릭터 설정도 그렇고, (드라마에서 등장했다는) 원작들에서는 없는 우츠미 역의 캐릭터들이 자아내는 모습은 원작 소설에서의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작 소설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풀 수 없는 문제를 만드는 것과 그 문제를 푸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울까?' 라는 의문에서 시작된 두 명의 대결과 그로 인한 긴장감, 그리고 이시가미가 세운 계획이 착각하기 쉬운 맹점을 이용했다는 것과 더불어 그 맹점이 결국은 독자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원작 소설은 마치 스릴러 같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궁극적으로는 로맨스 소설입니다.

영화는 상당히 애매합니다. 두 천재의 대결에서 오는 긴장감이 조여드는 순간에 유카와나 우츠미 캐릭터가 애초 의도는 윤활제 같은 것이겠지만, 결국에는 그 흐름에 방해를 놓고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이시가미는 연출 미스로 인해 원작과는 달리 의도치 않은 상황에서 웃음을 자아냅니다. (흐름상으로 전혀 웃음이 터질 상황이 아닌 때에 이시가미의 모습을 보고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것을 보면 확실합니다. 물론, 나라간 관객 정서상의 차이 때문이라고 볼 여지도 있습니다.) 원작과는 다르게 평범한 모습을 취한 영화의 이시가미는 그 몇몇 연출의 오류로 인해 원작 속의 뚱뚱한 캐릭터보다 오히려 더욱 오타쿠스럽고 히키코모리적 모습으로 다가오고, 그 이미지로 인해 뜻하지 않은 불필요한 웃음과 더불어 그의 내면에 대한 궁금함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결국은 이러한 면들로 인해 마지막 최종적인 반전, 이시가미의 그 지대한 헌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도 그리 큰 이펙트가 발생하지 못합니다.

"갈릴레오"라는 드라마를 본 그 드라마의 팬 분이라면 모르겠지만, 단순히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이라는 소설의 팬들이 본다면 이 영화는 다분히 실망스러운 영화일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식의 일본 영화에 별 흥미를 못 느끼는 저에게는 그 실망은 조금 더 컸고 말입니다.

P.S 뭐, 따지고 보면 저는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의 팬은 아닙니다.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로 잘 팔리기는 하지만, 그렇게 크게 재미는 못 느끼는 편인지라.

P.S2 사실, 이 영화의 감상기에는 근본적인 오점이 존재합니다. 제가 시사회에서 본 상영본은 128분 원판이 아니라, 122분 정도의 몇몇 장면이 삭제된 버전입니다. 솔직히 좀 황당하기는 합니다만, 연락이 닿아 확인해본 결과 국내 정식개봉시의 상영본은 삭제되지 않은 128분 버전을 상영할 것이라고 합니다. (글 참조) 그래도 혹시 몰라서 적는데, 수입사의 어떤 금전적인 수입에 미치는 영향은 일반 관객인 저는 모르겠습니다. (신경 써야 하는 이유도 없긴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식의 가위질은 정당하게 돈을 주고 극장을 찾는 관객들을 기만하고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P.S3 국내에는 오는 4월 9일 개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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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5 - [잡동사니] - 의심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
영화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은 우리에게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로 알려진 가스 제닝스가 각본 및 연출을 맡은 영화입니다. 영화는 1980년대의 한 영국 마을을 배경으로 두 명의 소년이 주인공인데, 이 이야기는 감독 자신의 어린 시절의 경험이 투영된 것이라고 합니다.

영화는 한마디로 하면 가스 제닝스판 "비 카인드 리와인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엄격한 기독교 종파 집안의 윌은 그 종파에서 정해놓은 규율 때문에 TV도 시청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학교에서 TV를 이용한 시청각 수업을 할때도 그는 TV를 보지 못하고 교실 밖에 홀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 윌이 즐겨하는 것은 그의 풍부한 상상력을 그림으로 표현해 공책에 그리는 것입니다. 윌의 세계는 바로 그 공책입니다. 그러던 중 윌은 학교에서 알아주는 말썽꾸러기인 리와 만나게 되고, 마침 '나도 영화감독'이라는 프로그램에 보낼 영화를 만들 계획이던 리가 윌의 풍부한 상상력을 이용하기로 하면서 둘은 '람보의 아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영화는 영화 만들기를 통해 두 꼬마들의 성장담을 그리고 있습니다. 종교로 인해 자신의 상상력과 자유를 펼칠 기회가 억압당했던 윌은 우연히 보게된 "람보"와 리와 함께 하는 영화 만들기를 통해서 진짜 자신이 원하던 자유를 만끽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윌이 그 자유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부분입니다. 윌은 꿈 속에서 자기가 만들어놓은 각종 캐릭터들과 한바탕 소동을 벌이는데, 애니메이션과 CG과 결합된 그 장면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아기자기함과 즐거움이 가장 극대화된 부분입니다. 이후의 영화 만들기 과정도 이러한 아기자기함이 이어지는데, "비 카인드 리와인드"를 언급했던 것도 단순히 영화만들기라는 소재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보이는 각종 아날로그적인 소품 및 제작과정으로 인해서입니다. 아이들이 만들어낸 그 소품들과 영화 촬영 과정은 웃음을 끊이지 않게 합니다. 성장은 윌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하는 말썽꾸러기 녀석, 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불량스러워 보이는 녀석이지만 괴롭힘을 당함에도 형에게는 싹싹한 아이로 영화 만들기는 리와 리의 형 사이에도 변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영화에는 이 두 아이가 큰 이야기를 이끌어나가지만 조연급으로 등장해 또다른 서브플롯을 이끄는 캐릭터들 역시 주인공 두 아이 못지 않게 큰 웃음으로 눈을 사로잡습니다. 윌과 리가 다니는 학교로 교환학습을 온 멋쟁이 프랑스 학생과 그 프랑스 학생을 졸졸 따라다니면 심복 노릇을 하는 영국인 학생들이 바로 그들인데, 이들은 적재적소의 타이밍에 영화 속의 감초 역학을 톡톡히 해냅니다.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은 단순히 재미라는 측면 외에도 감동과 두 아이의 이야기와 성장담을 통해 큰 공감을 자아내게 하는 영화입니다. 자신의 유년기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할가요? 유머와 감동, 두 가지를 모두 잡으며 이야기를 풀어낸 가스 제닝스의 각본 및 연출은 썩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아이들이 주말에 함께 극장가를 찾아 즐길 수 있는 재밌는 가족영화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P.S 영화의 원제는 Son of Rambow 입니다. 어라?! Rambo가 아니죠? 이 이유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 나오는 두 꼬마 녀석의 대화를 통해 아실 수 있습니다.

P.S2 시사회를 통해 미리 접한 영화로, 국내에는 오는 4월 16일 개봉합니다.


드래곤볼 에볼루션
보통 영화를 보면 시간이 통 안나서 등의 이유가 아니라면 감상기를 꼭 적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제 본 이 영화 "드래곤볼 에볼루션"은 과연 감상기를 적어야 하는지에 대해 지금 글을 작성하는 순간까지도 고민이 됩니다.

이미 영화가 개봉하기전부터 공개된 스틸, 예고편 등을 통해서 모든 기대치는 쓰레기통에 처박아놓았으며, 그에 따라 괴작이라는 변명으로 위안이라도 삼을수 있지 않을까 했던 "드래곤볼 에볼루션". 원작 "드래곤볼"은 딱히 설명할 필요도 없는 작품입니다. 그 만큼 유명하고, 거의 전설과도 같은, 특히나 지금의 20대 중반 이상에게는 소년시절의 추억이 듬뿍 담긴 작품이니까 말입니다. 그 작품을 바탕으로 각색, "데스티네이션"의 제임스 왕이 연출을 맡아 영화화한 이 "드래곤볼 에볼루션"은 원작의 스토리라인과는 사실은 별개로, 캐릭터와 설정 등만 빌려온 영화입니다.

2000년전 인류를 멸망 직전으로 몰고갔던 피콜로가 어떤 설명없이 그냥 부활해서 다시 한번 지구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고, 그런 피콜로를 손오공이 막아서게 된다는 간단한 이야기를 영화는 다루고 있습니다. 어차피 단순한 소년만화식 스토리야 별 불만은 없지만, 그 단순한 스토리마저 제대로 구현을 못하고 있는게 이 영화입니다. 어떤 최소한의 연결고리나 배경없이 영화는 그저 진행만 해나갑니다. 그 정도가 어느정도라면 한때 웹상에서 시끄러웠던 "투명 드래곤"이 "드래곤볼"과 만났다 정도라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너무도 어색한 배경 및 소품(....21세기 헐리우드 영화에서 국내 코메디 프로에서나 볼만한 스티로폼 티 있는대로 나는 돌무더기를 볼 줄이야.)에 조악하기 그지없는 CG, 형편없는 연출과 함께 그에 같이 휩쓸려들어간 배우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차라리 지금 눈을 감고 남은 시간 숙면을 취하는게 낫지 않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이 영화는 두말할 것이 없이 졸작입니다. 그것도 역대 코믹스 원작 영화 중에서도 최악의 졸작입니다. "드래곤볼"이라는 원작의 존재를 잊고서라도 말입니다. 이 영화는 깜찍(끔직?) 하게도 엔딩 크레딧 후에 후속편을 암시하는 쿠키 영상을 제공하는데, 20세기 폭스가 꿈에라도 후속작이라는 민폐, 삽질은 안 해주기만을 간절히 기원해봅니다.

P.S 솔직히 이 영화에 대한 글에 감상기, 리뷰 라는 말을 붙이는 것 조차 지금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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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3 - [Movie/News] - "드래곤볼 Z" 실사영화화 된다!

슬럼독 밀리어네어
돈 앞에서 결국은 그 얕은 우정의 깊이를 들어내고야 마는 인간의 속성을 보여준 데뷔작 "쉘로우 그레이브"와 희망없고 목표없는 청춘군상들의 삶을 그린 "트레인스포팅". 이 두 편으로 대니 보일은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 후 "비치"와 "28일 후", "선샤인"으로 이어진 그의 필모그래피가 닿은 곳은 뜻 밖에도 인도의 빈민가입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비카스 스와루프의 장편소설 "Q&A"를 "풀 몬티", "미스 페티그루의 하루"의 사이몬 뷰포이가 각색하고, 대니 보일이 연출을 맡은 영화입니다. 원작은 '람 모하마드 토마스'(라는 3개 종교의 이름을 가진)라는 소년이 거액의 상금이 걸린 퀴즈쇼에 출연, 답을 맞추게 되는 과정 속에서 현재와 그가 답을 알 수 밖에 없었던 그의 과거 경험담을 오가는 형태로 전개됩니다. 각색 과정에서의 캐릭터의 이름이나 이야기의 변경은 있지만, 영화는 기본적인 원작의 전개과정은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영화는 자말(데브 파텔 분)이 경찰서 취조실에서 갖은 심문을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텔레마케팅 회사에서 고작 차 심부름이나 하는 녀석이 2천만 루피가 걸린 퀴즈 대회에서 마지막 한 문제를 앞두고까지 다 정답을 맞춰오니, 한쪽에서는 자말이 속임수를 쓰는지 의심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자말은 그 곳에서 그런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심문 끝에도 자말은 자신은 답을 다 알고 있었다라고 주장하고, 경관은 녹화된 비디오를 보여주며 어떻게 그가 답을 알아냈는지 알아내려 합니다.

아카데미 주제가상 후보에도 올랐던 'O Saya'와 함께 어린시절의 자말과 그의 형 살림이 보입니다. 비행장에서 놀고 있던 자말, 살림, 그리고 아이들은 주둔하던 군인들에게 쫓기면서 빈민촌 구석구석을 달립니다. 대니 보일 자신의 "트레인스포팅"의 오프닝을 연상케 하는 이 영화의 오프닝 장면은 "트레인스포팅"과 마찬가지로 영화가 보여 줄 핵심을 드러냅니다. "트레인스포팅"의 그 모습이 훔치고, 사기치고, 더이상 망가질데가 없을때까지 망가지기 위해 달리는 청춘들의 모습이었다면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 빈민가 골목을 이리저리 누비는 아이들의 모습은 바로 그 빈민가를 벗어나고픈 욕망의 또다른 표현이자 다닥다닥 붙어있는, 마치 우리네 과거 판자촌과 같은 인도 빈민촌의 모습을 잡는 부감샷은 그럼에도 그 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하류층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빈민촌에서 벗어나려면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요?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신께서 운명지어주신 것과도 같은 기적.

영화는 퀴즈쇼에서 자말이 문제 하나하나를 맞이할때마다 그 문제의 답을 알게된 과거를 불러냅니다. 꼬맹이 시절 한 유명 영화배우의 팬이기도 했던 자말, 처음으로 타지마할을 보게 된 자말, 퀴즈쇼에 출전하기로 마음먹은 자말 등. 문제의 답은 모두 그의 삶 속에 있었습니다. 많은 부를 가지고,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한 빈민층 소년의 삶 속에 그 모든 문제의 답이 들어있었습니다. 답을 포함한 자말의 삶 속에는 인도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타지마할 주변에서 관광객의 가이드를 하던 중, 자리를 비운 사이에 관광객의 차가 다른 아이들에게 털리자 자말은 곤경에 처합니다. 그러자 그는 말합니다. '진짜 인도를 보고 싶다고 했죠? 이게 진짜 인도예요.' 영화는 자말의 과거를 통해 인도의 실제 모습을 담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 것을 통해 인도 빈민가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비인간적이고, 비양심적인 현실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런 막막만 현실에도 한줄기 희망은 있으니, 영화에서는 자말의 어릴 적 친구이자 그가 평생을 바라보는 소녀 라띠까(프리다 핀토 분)를 그 희망으로 내세웁니다. 자말은 라띠까를 위해 퀴즈쇼에 나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그것이 자말을 지금까지 살아숨쉬게 하는 이유입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

영화는 경쾌한 속도감이 느껴지는 편집과 촬영에 국내에는 "춤추는 무뚜"로 알려진 A.R. 라만의 곡이 더해져 어두운 현실의 그늘이 드리워질지라도 일관된 흥을 잃지 않습니다. 영화는 따뜻하고 즐겁고, 감동적입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존재합니다. 영화의 즐거움은 중반부까지는 유효합니다. 후반에 들어서 라띠까의 존재가 부각되면서 영화는 상투성이라는 늪에 빠집니다. 물론, 이 영화의 결말은 애초부터 누구나 예상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런 예상가능한 결말일지라도 그 목적지를 향한 여정을 어떻게 꾸리느냐에 따라 너무도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습니다. 조금은 낯설지만 그렇기에 더 새롭고 매력적인 음악과 그만큼 이색적인 인도의 모습, 그리고 그것을 담아내는 화면과 편집이 눈을 사로잡긴 하지만,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후반부의 이야기와 몇몇 연출은 지나친 진부함을 자아냅니다.

해외에서는 이 영화를 통해 대니 보일을 '디켄지언(Dickensian, 찰스 디킨스 애호가)'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이 영화를 두고 인도판 "올리버 트위스트"라고도 합니다. 그 말은 어쩌면 정확합니다. 자말의 삶을 통해 드러난 현실의 모습과 큰 부와 함께 행복을 누리는 주인공으로 마무리하는 이야기는 정확히 일치합니다. 동화 속 해피엔딩이 주는 매력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원하는 그런 삶을 꿈꿀 수 있게 환상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의 잔영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그 잔영을 붙들기 위해 너무 안일하게 달려들었습니다. 이 영화가 가진 전체적인 매력을 생각한다면 그 모습은 단연 '추락'에 가깝습니다. 꿈을, 환상을 좇는 모습이 오히려 그 환상을 깨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그리는 그 꿈의 정체가 단순히 일확천금을 통한 일종의 신분상승으로의 귀결이라고 봤을때 그 실망은 더욱 커집니다.

국내 상영본에는 영화가 시작하기전 아카데미 시상식, 골든글로브 시상식을 비롯, 각종  영화제 수상, 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한 내역이 무척이나 길게 나열됩니다. 마치 이런 느낌입니다. '봤지? 이 영화 대단한, 엄청난 영화야.'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재밌는 영화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영화는 아닙니다. 앞으로 대니 보일의 이름 앞에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감독이란 말이 붙을까요? 아니요. 그의 앞에는 여전히 "트레인스포팅"의 감독이란 타이틀이 붙을 것이며, 혹자들은 "쉘로우 그레이브"라는 인상적인 데뷔작으로 그의 이름을 기억할 것입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아니고 말입니다.

P.S 영화에서 인도의 모든 사람들은 자말의 도전에 흥분하고, 그를 응원합니다. 그리고 그의 성공에 다함께 기뻐합니다. 마치, 자기 일처럼. 그가 가진 상징성 때문입니다. 배우지도 못하고, 거리를 전전하던 아이가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 성공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자신들도 혹시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개천에서 용 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만큼 없는 자들의 성공이 있는자들보다 힘들기 때문에. 우리가 영화를 보며 자말의 성공을 기원하고, 기뻐하고 그것이 큰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더더욱 힘들어진 '개천에서 용 나는' 기적을 바라며 살 수 밖에 없는, 그런 삶의 어딘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현실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꽃가루가 날리는 모습에서도 씁쓸함을 느꼈나 봅니다.

P.S2 원작 소설의 경우도 그리 큰 재미는 못느꼈습니다. 책장을 빨리 넘길 수 있게 해주던 그 속도감 정도.

P.S3 시사회를 통해 미리 접한 영화로, 국내에는 오는 3월 19일 개봉합니다.


그냥 이렇게 한번 생각해 봤다. '코믹북을 시작하는 방법으로 유명한 슈퍼히어로가 시체로 발견되게 해보자.' 미스테리가 풀려감으로써, 우리는 이 슈퍼히어로 세계의 진심에 점점 더 깊이 이끌려가게 된다. 그리고 현실과 일반 대중들에게 각인된 슈퍼히어로 이미지들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왓치맨
1986년 출판되어 슈퍼히어로 그래픽노블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왓치맨"의 시작에 대해 작가인 앨런 무어가 밝힌 내용입니다. 그가 만들어낸 1985년의 미국은 그간의 슈퍼히어로 그래픽노블에서는 볼 수 없는 그런 것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미국은 정부에 동조한 일부 슈퍼히어로의 도움으로 베트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닉슨은 헌법을 개정해 3선 대통령이 됩니다. 그런 미국에 맞서 그들을 경계하는 붉은 군대, 소련. 이 둘은 막강한 군비경쟁을 벌이게 되고 그로 인해 핵미사일로 인한 세계 제3차대전의 암운이 감도는 가운데, 세상은 절망과 타락의 악취와 그 고통에 취해 비틀댑니다.

그런 현실에서 슈퍼히어로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슈퍼히어로의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한 '킨' 법령으로 인해, 그들은 나이트 아울 II(이하 나이트 아울)나 실크 스펙터 II(이하 실크 스펙터) 처럼 은퇴를 하거나 닥터 맨하탄, 코메디언 처럼 정부의 편에서 그들을 돕거나, 로어셰크 처럼 자경단원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이 세계 속 슈퍼히어로들은 기존 슈퍼히어로들의 철저한 비꼬기입니다. 닥터 맨하튼을 '슈퍼맨' 혹은 '신'이라고 칭하는 모습이나 자신의 집 지하에 부엉이 우주선 아치를 숨겨두고 있는 나이트 아울이 곧 배트맨이라는 것 등을 통해 그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신과 같은 슈퍼맨은 로이스 레인이 사라지자 인간들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화성으로 떠나버리며, 몸에 비계가 붙은 은퇴한 배트맨은 여자 앞에서 움츠러듭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만화 책 속에서 정의를 부르짖으며 호쾌하게 악당들을 때려눕히는 멋드러진 모습이 아닌. 그러던 중 그들중 한명인 코메디언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고, 그것에 의심을 품은 로어셰크가 과거의 동료들과 접촉을 시작합니다.

'Who watches the watchmen?' '감시자들은 과연 누가 감시할 것인가?' 평화와 정의를 지켜주려 나섰다는 그 슈퍼히어로들은 과연 올바른 것인가? 그들의 옳고 그름은 과연 누가 판단할 것인가? 자신들이 지켜야한다고 믿는 정의와 평화에 사로잡힌 그들은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버리고 맙니다.

그래픽노블이 출간된 이후, 헐리우드는 바로 이 작품의 영화화에 관심을 보입니다. 처음 20세기 폭스에서 시작이 된 프로젝트는 후에 워너를 거쳐 유니버셜, 파라마운트, 그리고 다시 워너로 돌아갑니다. 그 여정에서 많은 감독과 작가들이 이 프로젝트에 손을 댑니다. 테리 길리엄은 '이 프로젝트는 영화보다는 5시간짜리 미니시리즈로 만드는게 옳다'며 프로젝트를 떠나고, 대런 애로노프스키, 폴 그린그래스 등이 한때 감독직에 내정되기도 합니다.


2006년 6월, 워너는 "300"의 잭 스나이더가 "왓치맨"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고 발표합니다. 잭 스나이더는 제안을 받고 2주간 감독직을 수락할지에 대해 고민했는데, 결국 자신이 안하면 또 다른 누가 이 작품을 망칠 것이라는 생각에 제안을 수락했다고 합니다. 각본을 맡은 알렉스 티세는 이전 데이빗 헤이터의 두 각본에서 최고의 요소들을 뽑아내어 기존의 현대배경이 아닌 원작처럼 배경을 냉전시대로 설정합니다. 잭 스나이더는 결말의 음모를 단순화시킨 헤이터의 각본들 중 하나의 엔딩을 유지하고자 했는데, 그를 통해서 캐릭터를 소개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잭 스나이더는 "300" 때와 마찬가지로, 원작을 스토리보드 삼아 주석을 달아가며 영상으로 옮기기 위해 노력합니다. 감독 자신이 원작의 팬보이이기에 그는 원작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으려고 마음 먹습니다. 비록, 앨런 무어가
'나는 결코 그 영화를 보러 가지 않을 것이다. 내 책은 코믹 북이다. 영화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다. 코믹북이 가장 올바른 표현 방식이고, 그것을 통해 읽혀지게 만들었다. 안락의자에 앉아 난로가 옆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곁들여 마시면서 말이다' 라고 말하며, 심지어 이 영화의 크레딧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하고 일체의 저작권료를 받지 않겠다고 했더라도 말입니다. 거기다 무어가 "300"을 보지는 않았지만, 들은 바를 통해서 잭 스나이더의 그 영화는 인종차별적이고, 호모포비아적인 성향을 띄는 등 스나이더의 작품에 문제가 많다고 비난했더라도.

앨런 무어

잭 스나이더가 만들어낸 영화 "왓치맨"은 원작에서 대한 무한한 헌사의 산물입니다. 영화는 원작 그래픽노블이 보여주던 세계보다 훨씬 더 어두운 색조를 유지합니다. 그러면서 영화의 스토리라인을 그대로 따라나갑니다. 물론, 방대하고 복잡한 원작을 그대로 표현해기는 애초부터 무리입니다. 잭 스나이더는 1세대 슈퍼히어로들의 삶을 영화의 오프닝 부분에서 간략하게 설명해주는 방식을 차용하는데, 이 방법은 상당히 유용했습니다. 원작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설명하면서, 앞으로의 런닝타임의 제약도 어느정도 해소합니다. 잭 스나이더는 원작이 주는 의미와 방식을 최대한 유지해나가며, 원작의 디테일과 그 상징적인 의미들을 구현해내는데 그 모든 촛점을 맞춥니다. 그는 자신을 원작의 숨은 상징(easter eggs)를 지키는 문지기라고까지 칭합니다. 그렇다보니 당연히 일반적인 대중성과는 담을 쌓습니다. 어차피 열혈 팬보이들에게는 잘만드나 못만드나 비난 받을 것이 뻔함에도 대중과의 괴리를 선택하고, 자신의 소신을 밀어붙인 잭 스나이더의 선택은 놀라움을 자아내기까지 합니다. 대중을 향해 손을 뻗는 일은 포기했지만, 그럼에도 영화가 택한 최소한의 연결선을 유지하기 위한 선택은 단호했습니다. 일부 서브플롯의 제거가 그것입니다. 원작에는 영화에서도 등장하는 신문가판대의 남자와 그 옆의 소년. 그리고 그 소년이 읽는 만화책인 '검은 화물선 이야기'가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 같이 삽입되어 전개됩니다. 난파를 당하고 혼자 살아남은 한 선원은 죽음을 부르는 검은 화물선이 자신의 마을로 향하는 것을 보고는 보통 때라면 하지 못할 끔찍한 행동과 거친 상어(shark)의 공격도 물리치고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뭍에 도착합니다. 마을에 들어선 그 선원은 공포와 두려움에 눌려 깨닫지 못한 놀라운 현실의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 '검은 화물선 이야기'는 이야기 속 이야기로 슈퍼히어로들의 현재의 심리상태와 그들이 행하고 있는 행동을 투영해 보여줍니다. 따라서 그만큼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영화에 직접적으로 포함되었다면? 이 영화는 두 단어의 조합이 어색한 블럭버스터 컬트 영화로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아니, 대체 분간할 수 없는 이야기 구조를 가진 난잡한 영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픽노블이 가질 수 있는 성취와 영화가 표현해내고 보여줄 수 있는 그 한계를 정확히 판단한 결과입니다. '검은 화물선 이야기'가 빠진 것은 물론 아쉬운 일이지만, 그 선택은 옳았습니다.

이 영화에는 잭 스나이더가 자랑하는 매끈하고, 때로는 스타일리쉬한 영상미는 있을지언정 이런 류 블럭버스터의 미덕이라고 여길 수 있는 화려한 액션이나 정의의 가치 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원작의 충실한 구현이 모토인 이 영화는 애초에 그런 것에는 관심 조차 없었습니다. 'It's a joke. It's a all a joke.' 코메디언의 대사와 같은, 원작처럼 영화는 지독하고 쓰린, 그래서 그냥 넘기기 힘든 농담입니다. 그 농담은 나이트 아울과 실크 스펙터의 정사씬에서 흘러나오는 "할렐루야"의 비꼬기처럼 웃음을 주기도 합니다만, 그 쓰라림은 어디가지 않습니다. 그 농담이 감춘 마지막 진실의 모습에서 우리가 생각하고 정의내리는 평화와 선, 정의에 대한 개념이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립니다. 영화가 비록 간결성을 위해 원작과는 다른 방식으로 마지막에 일어나는 파국을 표현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코 그 주제와 메세지는 흐릿해지지 않습니다.

영화는 마무리에서 원작과 다르게 관객에게 직접 물음으로써, 쐐기를 박습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당신도 이게 옳다고 생각하잖아."(마지막에 도시를 비추는 장면에서 건물 옥상의 광고판을 주목.) 과연 이것이 옳은가? 아니면 그렇지 못한가? 에 대한 고민이 싹튼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규정하고 있는 선악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다시 한번 여실히 드러내줍니다.

원작을 이 정도로 다른 누군가가 만들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은 부정적입니다. 영화 "왓치맨"은 결코 친절한 영화가 아닙니다. 기분 나쁘고 재수 없으며 그렇기에 끔찍한 농담입니다. 하지만, 부정하기 어려운 진실입니다. 그 진실을 잭 스나이더는 온전히 담아냈습니다.

P.S "다크 나이트"가 없었다면, 과연 잭 스나이더가 영화를 이렇게 만들 수 있게 워너가 승인을 해줬을지는 말그대로 의문입니다. "다크 나이트" 만세!


킬러들의 도시
시사회를 보고 나오는 길에 팜플렛을 모으는지라 "킬러들의 도시" 팜플렛을 찾아서 뽑아들었습니다. 전 단언합니다. 이 영화가 국내에서 소리소문없이 묻힌다면 그것은 영화를 보기도 전에 관객들로 하여금 전혀 엉뚱한 영화에 대한 기대와 상상을 하게 만들어버리는 한글 제목과 홍보문구의 조합 때문입니다.

"킬러들의 도시", '죽이지 못하면 죽는다! 죽여라. 그리고 즐겨라!!' '2009년 3월 품격있는 킬러들의 액션이 온다!'

영화는 살인청부 임무를 완수한 두명의 킬러가 런던을 떠나 숨어있으라는 지시를 받고 벨기에의 브리주(외국지명은 이래서 어렵습니다. 백과사전에서는 브뤼헤, 브뤼주라고도 하고, 브뤼게라고도 하며 다 제각각으로 불리니...)로 오게 되면서 시작합니다.

킬러 중 한명은 콜린 파렐이 연기하는 레이로 그는 브리주를 시궁창 같은 도시라고 하며 불평합니다. 다른 한 명은 브렌든 글리슨이 연기하는 레이의 선배 킬러 켄으로 그는 이 브리주를 너무도 마음에 들어하며, 불만을 토하는 레이를 진정시키며서 아름다운 브리주를 둘러보자고 합니다. 이들이 기다리는 다음 지시의 명령자는 해리(랄프 파인즈 분)라는 인물로 그는 어릴때 경험했던 브리주가 천국과도 같은 느낌이었다며 켄에게 그 곳에서의 경험을 레이의 마지막 선물로 줄 수 있어 좋았다 말합니다. 마지막 선물? 해리는 켄에게 레이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영화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영화는 결코 어떤 액션이 주가 되는 영화는 아닙니다. 영화는 유럽에서 중세유럽이 가장 잘 보전되어 있다는 유명한, 그리고 아름다운 도시 브리주에 그런 도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세 명의 킬러들이 모이게 되면서 벌어지는 상황들과 그 킬러들의 각각의 뚜렷한 개성들이 빚어내는 화학작용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툭툭 나오는 유머들이 더해져 영화는 웃음이라는 요소도 잃지 않으며, 이어지는 예상치 못한 상황들로의 전개는 흥미를 더합니다.

레이와 켄은 브리주의 박물관에서 그림을 둘러보는데, 레이는 생리박피형을 그린 제라르 다비트의 "캄뷔세스 왕의 재판"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립니다. 그 잔혹한 형벌은 실수로 아이를 죽이고만 죄책감에 시달리는 레이에게는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이어서 레이는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최후의 심판"을 보고 마음에 든다고 하며, 그 중 연옥을 지목합니다. 은총을 받기는 했으나 경미한 죄를 사함받지 못한 상태, 죽어 마땅한 죄를 사함받은 상태, 불완전한 상태, 또는 악습 등 모든 더러움을 씻음받지 못한 채 죽은 사람들이 죄를 모두 씻어 천국으로 가기전 기다리는 장소. 레이는 켄에게 최후의 심판과 사후세계, 죄책감, 죄악에 대해 믿느냐고 묻지만, 켄은 믿지 않는다고 답합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레이에게는 누구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쉼터인 브리주가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죄를 지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죄책감의 무게가 더해져 더욱 그를 옳메는 공간으로 변모, 연옥과 다름 없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인해 삶을 포기할 뻔 하지만 우연한 켄의 만류로 눈물을 쏟으며 자신의 괴로움을 토로합니다. 그 눈물을 본 켄은 레이는 이러한 삶이 어울리지 않으며 새로운 삶을 살아야한다고 느낍니다. 켄은 브리주를 마음에 들어하며 그 자신은 천국과도 같은 이곳이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할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영화는 이런 둘의 변화과정에 들어서면서 세 번째 인물인 해리를 등장시킵니다. 해리는 정해진 룰은 지켜야 한다는 신념에 사로잡혀 있는 용서를 모르는 거친 사내로, 그는 결국 그런 지나친 신념에 사로잡혀서 우를 범하고야 맙니다.

브리주는 이 세 명에게 각각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레이에게는 자신의 죄를 씻기를 기다려야하는 유배지인 연옥, 켄에게는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며 머물고 싶은 천국, 해리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악행의 구렁텅이에서 언제가 돌아가고픈 천국입니다. 영화는 이 세 명의 브리주를 통해서 삶에 대해, 그리고 그런 삶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죄악과 그것으로부터 구원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레이는 마지막에 이 곳 브리주에 묻히는 것만큼 최악은 없다고 말합니다. 연옥에 영원히 머무르며 천국에 오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씻고 천국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레이의 바람입니다.

영화는 각각의 킬러들을 연기한 세 명의 배우들의 연기와 그 호흡을 보는 것도 재미를 주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결국은 이 영화의 각본 및 연출을 맡은 마틴 맥도나입니다. 2006년 "식스 슈터"로 오스카 단편영화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는 그가 처음으로 내놓은 장편인 이 블랙 코메디 영화는 그의 이름과 앞으로의 행보에 큰 기대를 품게 만듭니다.

P.S 시사회를 통해 미리 접한 영화로, 국내에는 오는 3월 5일 개봉합니다.

그랜 토리노
흔히들 알고 있듯이, 감독이자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보수파입니다. 그렇기에 공화당을 지지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보수파, 공화당. 이러면 네오콘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강경 보수 우익인 신보수주의를 떠올리기 쉽지만, 그는 보수라는 큰 틀 안에서 자유의지론자에 가까운 성향을 띤 인물입니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달러 3부작', 혹은 그의 "용서받지 못한 자"처럼 총 하나 홀로 들고 자신의 판단과 정의로 서부를 누비는 총잡이, 그리고 "더티 해리",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보이던 안락사 문제와 혈연관계로 이루어진 전통적 가족상의 어긋남과 그 붕괴를 대체하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주목, "미스틱 리버"에서는 무너져 내린 정의를 수수방관하는 미국을, "체인질링"이 부당한 공권력에서 맞서는 한 어머니의 위대한 개인의지의 발로를 그리고 있는 것처럼 그의 연출작, 출연작에는 그런 그의 성향이 상세히 드러납니다. 그가 과거 USA 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자유의지론적(libertarian) 시선을 좋아한다고 밝히기도 했으니, 이건 확인사살 정도가 될까요?

그러한 그의 시선은 그가 연출 및 주연을 맡은 최신작 "그랜 토리노"에서도 이어집니다. '사실, 연기를 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내 나이대의 이야기였고, 나에게 딱 맞는 역할이라고 느껴졌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말처럼 이 영화는 그에게 딱 부합하는 영화입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맡은 역할은 한국전 참전용사이기도 한 월트 코왈스키라는 노인입니다. 코왈스키는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보수적인(이라고 쓰고, 꼰대스러운 이라고 읽습니다.) 노인입니다. 포드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던 코왈스키는 그런 자신의 아들이 도요타를 몰고, 또 그 차의 딜러로 일하는 것에 신경질을 냅니다. 버르장머리 없는 손녀를 보며 잔뜩 인상을 찌푸리는 것 역시 빼놓지 않습니다. 그가 거주하는 동네는 백인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이제는 동양계인 몽족들이 이주해와 거의 몽 타운이 된지라 그 또한 그에게는 짜증나는 일입니다. 코왈스키의 옆 집에도 몽족 가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랜 토리노

영화는 빈번히 성조기와 코왈스키를 같이 잡으며 둘을 동일시합니다.

처음에는 옆집의 그들과 갈들을 빚던 코왈스키는 수(아니 허 분)라는 소녀를 알게 되면서 점차 변화를 겪습니다. 그리고 수를 통해 그녀의 동생인 타오(비 방 분)를 만나게 됩니다. 타오는 몽족 갱단의 신고식으로 인해 원치않은 일이지만 코왈스키의 1972년 형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다가 들키고 그 이후로 감정의 골이 있는 상태이지만, 수의 노력으로 그 둘은 점차 가까워집니다. 하지만 수와 타오를 괴롭히는 몽족 갱단의 횡포는 점차 심해지고, 코왈스키는 그의 인생에서의 중대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코왈스키는 몽족 갱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만 하는 타오를 '겁쟁이'(big fat pussy)라고 칭하며, '스스로 맞서 싸우라고'라고 말합니다. 자신과 가족의 안녕은 자기 스스로가 나서야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타오는 그의 말을 따르지 못합니다. 그는 아직 어리고, 아직 많은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코왈스키는 그런 타오를 재촉하기 보다는 일종의 멘토의 역할을 자임합니다. 지금은 아닐지라도 언제가는 스스로로 나설 수 있도록 준비를 시키는 것입니다.

영화는 코왈스키와 타오의 이런 관계를 통해 "밀리언 달러 베이비" 처럼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코왈스키와 아들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코왈스키는 무뚝뚝하고 자식에게 정을 표현하는 법을 몰랐고, 아들은 어떻게 하면 아버지 집을 팔아치울까 아니면 혹시 아버지를 통해 풋볼 티켓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손녀의 관심사는 할아버지가 죽으면 그랜 토리노는 내가 차지할 수 있을까 입니다. 코왈스키에게 양로원 팜플렛을 내미는 아들 내외의 모습은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매기에게 재산위임계약서에 서명하라던 그녀의 가족들 같습니다. 매기(힐러리 스웽크 분)가 혼자였던 것 처럼 "밀리언 달러 베이비" 속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딸에게도 외면 받는 실패한 트레이너였으며, 이 영화의 코왈스키 역시 혼자입니다. 코왈스키가 새롭게 관계를 맺는 이들은 그가 경멸하던, 그와 다른 인종인 수의 가족입니다. 수의 초대를 받고 간 파티에서 문화의 차이도 느끼긴 하지만 새로운 경험과 만남으로 인해 점차 그들에게 마음을 열게 됩니다. 수는 그런 코왈스키에게 아버지가 해주지 못했던 타오의 롤모델이 되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일종의 유사가족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이들은 "용서받지 못한 자"와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모건 프리먼처럼 인종의 경계를 넘어선 관계입니다. 극도의 보수주의자로 인종차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코왈스키가 그 생각의 벽을 허물고 수와 타오의 가족과 가까워지고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통해 영화는 반인종차별주의적 생각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 밀리언 달러 베이비 밀리언 달러 베이비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로 자노비치 신부(크리스토퍼 칼리 분)가 있는데 그는 코왈스키의 아내가 신신당부했다며, 그에게 고백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고 마음의 평온을 얻으라고 합니다. 그는 끈질기게 그를 찾아와 설득하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합니다. 코왈스키는 자노비치 신부에게 자신은 교회를 믿지 않으며 자신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은 어떤 명령(과 같은 외부의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그간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에서처럼 그에게 중요한 것은 종교나 법이 강제한 무엇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그 행동입니다. 그의 마음을 괴롭히던 것의 해결 역시 종교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그는 성당을 찾았고 신부에게 물음을 던졌지만, 그에게 명확한 답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죽어가는 그의 또 다른 '혈육'을 위한 결정에 종교는 반대를 표했지만 그는 그녀를 위해 결심을 하고 행합니다. "그랜 토리노"에서도 그는 자신의 마음을 위로할, 그로 인해 평온해질 방법을 종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찾아 결정합니다. 몽족 갱단들이 있는 한 수와 타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 결코 평화로워질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런 판단이 가장 우선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는 타오의 얼굴에서 그를 괴롭히던 과거의 상을 떠올렸을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일어선 그 분연한 의지와 결단은 다른 이들에게는 평화를, 그에게는 그를 괴롭히던 마음의 불안을 잠재워줍니다. 십자가의 예수와 같은 그의 모습은 그것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자노비치 신부는 말합니다. 코왈스키에게서 오히려 많은 것을 배웠다고.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영화 속 코왈스키의 차 '그랜 토리노'는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사는 차입니다. 몽족 갱단들이 눈독을 들이는 차이기도 하며, 코왈스키의 지인 역시 관심을 가집니다. 그가 가진 그 차는 단순히 멋있는 자동차가 아니라 성공을,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합니다. 코왈스키가 소유하고 있던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드는 몽족 갱단의 모습은 결국 미국의 주류인 백인보수층이 다른 인종들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자신들의 성공을 훔쳐서 좀먹으려는 존재들. 그들은 처음 코왈스키가 보여줬던 것처럼 총을 겨누며 막아섭니다. 하지만, 코왈스키는 변합니다. 타오와 정을 나누면서 그는 타인종이 무조건적인 악이 아니라 타오와도 같은 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타오를 가족과도 같은 관계로 받아들입니다. 코왈스키가 타오에게 가르치는 것은 그저 남자답게 사는 방법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성공해 일어나는 방법입니다. 코왈스키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닌 타오에게 자신의 그랜 토리노를 넘겨주는 것은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그 성공의 희망을 주류 백인들만의 울타리에 가두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타오로 대변될 수 있는 다른 인종의 미국인들과도 나누는 것입니다. 영화는 그것이 저무는 세대가 새로운 세대에게 주는 선물이자 역할이라고 말합니다. 코왈스키의 굳은 결심과 어우러진 그 의미는 더욱 빛나며 누구나 꿈꿀 수 있고 그렇기에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아메리칸 드림'이 지금의 미국을 있게 했다는 것에 비추어 그 가치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합니다.

그랜 토리노

'아메리칸 드림'의 또다른 상징. 코왈스키의 그랜 토리노.

영화 "그랜 토리노"는 인생의 경험이 많은, 그리고 신념이 굳은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것 같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때로는 웃음을 주며,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가슴 깊이 울리는 감동을 함께 전해 줍니다. 강압적으로 윽박지르는 설교를 늘어놓는게 아니라 머리와 가슴으로 모두 생각케 하는 뜻깊은 교훈을 남기는 그런 이야기. 그 이야기는 그의 인생 모든 경험이 총집대성된 이야기입니다. 과거에는 서부의 총잡이로, 때로는 강력계 형사로, 가장 최근에는 한 모성을 지지했던 그의 인생 이야기말입니다. 그는 너무도 훌륭한 감독이자, 배우이자, 그리고 보수주의자입니다.

우리나라 나이로 여든의 고령에도 누구 못지않은 정력적 활동으로 끊임없이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주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님에게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의 전작 "체인질링" 때에도 했던 말이지만 감독님, 오랫동안 저희 곁에 머물러주세요.

P.S 아카데미는 이 영화를 왜 작품상이나 감독상 후보로 선택하지 않았을까요? 올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숀 펜이 수상소감에서 웃으며 말한 바처럼 '그들이 호모를 더 좋아해서' 일까요? (농담)

P.S2 영화에서 나름 눈에 띄는 장면은 그의 "용서받지 못한 자"를 연상케 하는 장면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를 보신 분들이라면 그 장면으로 인해 오히려 더 많은 감정의 교차 혹은 반전을 느끼실 수도...

P.S3 프레스 블로그에서 주최한 시사회를 통해 본 영화로, 국내에는 3월 19일 개봉합니다.

P.S4 영화의 예고편 등의 부가영상 및 소개는 홈페이지 http://www.gran-torino.co.kr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핸드폰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 무엇일까요? 기본부터 확실히 하자라던가 중간이라도 하자 아닐까요? 참 말은 쉬워보이고, 그래 보이지만 또 막상 해보면 그렇지도 않으니까 말입니다.

한 매니지먼트 대표와 그가 잃어버린 핸드폰을 주운 정체불명의 남자가 옥신각신 하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 "핸드폰"은 휴대폰이라는 너무도 익숙하고 현대인의 생활에서 떨어질 수 없는 문명의 이기를 가지고 현대사회에 만연한 소통의 부재와 사람과 사람사이의 기본적인 배려의 부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휴대폰을 통해 너무도 쉽게, 그리고 즉각, 아무리 멀리 떨어진 다른 누구와도 직접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정작 때로는 가장 소중한, 가까운 사람과의 대화는 하지 못하는게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영화는 잃어버린 핸드폰을 두고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그것을 조명합니다.

소재와 그 주제는 좋습니다. 문제는 영화가 가지고 있는 스릴러란 장르를 통해 저 주제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모습이 너무도 실망스럽다는 것입니다. 영화는 협박을 당하는 오승민(엄태웅 분)의 예의없고 거친 행동들을 보여준 이후에 그를 협박하던 정이규의 정체를 드러내보입니다. 그리고는 정이규의 배경을 보여줌으로써 주제를 결부시켜나가며 그가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당위성을 부위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 당위성을 향한 노력은 정이규라는 존재에 대한 동정으로 변모할 소지가 다분하며 이 둘에 대한 시각차이가 순식간에 변해가는 상황은 관객들에게 두 명의 캐릭터에 대한 정의 자체에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영화는 전개과정에서 꼭 필요한 각종 사건에게도 너무 부차적인 상황의 설정과 겉도는 이야기가 많아서 전체적으로 산만한 느낌을 주며, 그 필요한 사건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작위적인 느낌을 입힘으로 인해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쫓고 쫓기는 느낌이 주는 재미는 흐지부지한 상황에서 끝까지 별 필요없는 부차적인 반전의 시도는 안쓰러워보이기까지 합니다.

이 영화는 상업영화입니다. 그리고 장르영화입니다. 이러한 조건에 따라 갖추어야할 가장 기본적인 사항은 그 장르가 주는 쾌감과 재미를 관객에게 먼저 제공하는 것입니다. 왠지 의미있고, 거창해보이는 주제? 그건 일단 이 기본부터 해결한 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더 레슬러
미키 루크의 잊혀진 재능, 그것이 내가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가장 큰 이유이다.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말입니다. 아로노프스키는 많은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밀어붙여 미키 루크에게 랜디 '램' 로빈슨 역을 맡깁니다. 80년대 절정의 인기를 얻었던 미남 스타에서 방탕한 생활과 성형수술 실패로 퇴물 배우로 전락해버린 미키 루크는 그렇게 그의 인생과도 닮은 한 프로 레슬러를 연기하게 됩니다.

영화는 오프닝에서 80년대 너무도 큰 인기를 얻었던 랜디 '램 로빈슨의 모습을 요약해보여줍니다. 아나운서의 찬사,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대기록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 후, 허름한 대기실을 나와 자신의 트레일러 하우스를 향하는 랜디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세월은 그에게서 부와 인기, 그리고 신체적 젊음을 앗아갔습니다. 랜디는 과거의 150만명이 넘게 지켜봤던 TV 중계 속의 절정의 스타 레슬러가 아니라 하우스쇼를 통해, 그리고 체육관 한 쪽에 테이블을 차려놓고 과거의 영광을 팔아 삶을 이어나가는 한물간 레슬러일 뿐입니다. 세월이 그에게 빼앗아간 것은 인기와 젊음만이 아닙니다. 가족 역시 그러합니다. 그는 외롭습니다. 허름한 집과 스트립클럽에서의 짧은 유흥만이 그에게 남아있습니다.

영화는 필름의 거친 입자로 랜디의 현재의 모습을 담습니다. 그 거친 느낌은 마치 랜디가 겪었던 세월이 남긴 흔적 같습니다. 영화는 많은 부분을 그의 뒷모습을 좇습니다. 그가 바라본, 그가 마주한 현실을 관객 역시 그의 어깨 너머로 같이 볼 수 있습니다. 영화가 그리는 랜디의 삶은 프로레슬링의 세계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합니다. '짜고 치는 고스톱'. 혹자들은 프로레슬링을 그렇게 말합니다. 영화에서도 그들이 경기 전 합을 맞추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핵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어서 보이는 것은 피로 얼록진 랜디의 모습입니다. 격렬한 하드코어 경기로 배에는 상처가 벌어져있으며, 그의 등에는 철심이 박혀있습니다. 링 위는 철저한 현실입니다. 그 위에는 각본으로 구성된 한낱 쇼가 아닌 열정과 그리고 그에 따르는 고통이 있습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90년대 초 영화학교를 다니며 이 영화를 구상했다고 합니다. 많은 복싱 영화들이 만들어졌고 하나의 장르처럼 여겨졌을 때, 프로레슬링을 다룬 영화는 소수였고 아로노프스키는 프로레슬링 역시 진짜 스포츠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는 프로레슬링이 주는 실제와 속임수 사이의 매력에 이끌렸다 말합니다. 프로레슬링과 영화로 대변될 수 있는 쇼비즈니스계는 서로 닮아 있습니다. 스크린과 무대에서 보이는 허구의 모습과 그 이면에 있는 또다른 현실이 말입니다.

더 레슬러

그렇기에 "더 레슬러"의 미키 루크는 단순히 삶의 유사성이 아니라, 그가 걸었던 영화계에서의 길을 이 영화에서 보여줍니다. 영화에서 랜디의 몸에 난 상처에 같이 아파하고, 진짜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팬들이 있는 그 링 위로 돌아가며, '이 곳이 바로 내 세상이다.'라고 하는 랜디의 말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미키 루크를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어 미키 루크가 연기하는 랜디의 얼굴 표정과 주름, 그의 눈빛과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랜디가 가진, 영화가 가진 진정성을 더욱더 극대화시킵니다. 그가 사랑하는 일에 대한 그 열정을, 링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한 레슬러를 말입니다. 영화에는 미키 루크와 짝을 이루는 캐릭터로 스트리퍼 캐시디(마리사 토메이 분)가 등장합니다. 그녀 역시 랜디와 마찬가지입니다. 밤에는 그녀의 몸을 드러내며 돈을 벌지만, 낮에는 혼자 아들을 키우는 엄마일 뿐입니다. 캐시디는 랜디를 붙잡고 진짜 세계에 있으라고 하지만 랜디가, 미키 루크가 바라보는 곳은 저 세상이 아닌 바로 이 곳입니다.

미키 루크는 너무도 큰 묵직함으로 완벽하게 돌아왔습니다. 이 영화는 분명 가상의 이야기(fiction)입니다. 하지만 미키 루크로 인해 이 영화는 실화(true story)가 되었습니다.
미키 루크가 없었다면, 이 영화 역시 없습니다.

P.S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주최한 '아카데미의 보석들' 프로그램을 통해 본 영화로, 국내에는 3월 5일 개봉합니다.

P.S2 씨네21에서 미키 루크가 "씬 시티"에 출연했을 때 올린 기사가 있어 링크해 둡니다.

P.S3 영화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입니다. 접어두겠습니다.


더 리더 : 책 읽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이하 더 리더)는 시대의 흐름 앞에서 고민하는 인간과 용서, 사랑에 관한 영화입니다.

1995년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는 마이클은 아침 창가에서 서서 그의 과거를 봅니다. 1958년, 15세이던 마이클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구토를 하게 되고 그것을 본 한 여성의 도움을 받습니다. 마이클은 감사의 뜻을 전하러 다시 그녀를 방문해 그녀와 첫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후 한나라고 자신을 밝힌 여성과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며 연인과도 같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관계를 가지면서 그들 사이에는 일종의 규약이 생기게 되는데, 마이클이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고 그 이후에 섹스를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마이클은 그저 한나가 시키는대로 합니다. 그러던 중 한나는 사무직으로의 승진을 제안받고 그녀는 돌연 떠나고, 마이클은 상처를 받습니다.

마이클이 한나를 다시 만난 것은 1966년 한 법정에서 입니다. 한나는 과거 나치 수용소의 감시원이었다는 이유와 그 때의 행적들로 인해 법의 심판대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단순히 성에 민감한 시기의 한 소년의 경험담처럼 느껴졌던 이야기는 이 시점부터 또다른 차원으로 나아갑니다. 한나가 감추하고 하고 싶은 비밀을 알아챈 마이클이 갈등이 시작된 것입니다. 한나의 비밀을 알게 된 마이클은 고민합니다. 자신이 그 비밀을 밝혀야 할까? 그렇게 한다면 한나는 정상참작을 받겠지만, 그것을 통해 그녀와 자신의 관계가 주변에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수치를 감내하기 위해 더 큰 죄를 택하는 한나와 그녀를 구해낼 방도를 알고 있음에도 고민하는 마이클. 이 둘의 관계는 독일의 현대사를 투영합니다. 나찌 독일을 경험했던 세대와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던 전후 세대. 나찌는 결코 독일인들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입니다. 전후세대는 바로 그 부끄러움을 비난합니다. 그 부끄러운 일이 자행되도록 방관한 것과 나찌의 협력자들을 모른척하며 함께 지낸 그 사실을 비난합니다. 하지만 마이클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한나와 사랑을 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갈등합니다. 그 때 그가 택한 길은 한나에 대한 사랑에 더해 죄책감을 안깁니다.

후에 마이클이 한나에게 보내는 테이프들에는 그가 잊지 못하는, 한나에 대한 마음과 더불어 그녀에게서 돌아서야했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한나에 대한 마이클의 마음은 죄책감에 가까워 보입니다. 한나는 그것을 느낀듯 새로운 삶을 거부합니다. 한나가 마이클에게 남긴 부탁은 그녀 자신의 일말의 죄책감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바람과 더불어 마이클이 한나에게 느끼는 죄책감에서의 해방을 돕습니다. 한나 본인은 죄책감에서 벗어날런지 모르겠지만, 희생자의 상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상처는 한나가 양동이로 물을 끼얹어 마이클의 구토 자국을 지우듯이, 혹은 검댕을 뒤집어쓴 마이클을 한나가 씻겨주듯이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두 세대의 독일인 사이의 문제는 몰라도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의 문제는 아닙니다.

영화는 소설의 주제를 옮겨내기 위해 최선의 각색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디 아워스"에서 함께 했던 스티븐 달드리와 데이빗 헤어의 조합은 괜찮아 보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영상화를 위한 함축성이 생략으로 느껴질 정도로 표면적 이야기와 내면적 이야기를 연결하는 것이 버거워 보일 때도 있습니다. 미묘한 어긋남은 지속적이며 이면에 있는 주제보다는 그저 사랑 이야기로 비춰질 가능성이 농후하고 그 이격은 캐릭터의 감정을 이해하는데도 썩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며 아쉬움을 자아냅니다. 영화는 그 간격을 한나 역의 케이트 윈슬렛의 호연으로 채우려하는 듯합니다. 윈슬렛의 연기가 훌륭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영화가 보여주는 일말의 아쉬움은 그럼에도 길게 남습니다.

"더 리더"는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수용소 시설을 둘러보는 마이클의 모습이 길게 연결되는 장면에서 보이는 그런 느낌이 후보에 오르는데 일조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러한 연유로 에드워드 즈윅의 "디파이언스"가 혹 지금의 결과물처럼 실망스럽게 나오지 않았다면, "더 리더"의 자리에 들어갈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더불어 말입니다.

"월-E", "다크 나이트", "다우트". 이 중 어떤 영화가 "더 리더"의 자리에 들어가도 이상할 바가 없지만, 아카데미니까 말입니다.

P.S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진행되는 '아카데미의 보석들' 프로그램을 통해 본 영화로 국내에는 3월 26일 개봉합니다.


"비지터"는 한 노인의 뒷모습을 비추며 시작합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월터 베일(리차드 젠킨스 분)입니다. 그는 오늘 처음으로 피아노 교습을 온 사람에게 오늘로 레슨은 그만하자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녀가 월터에게 묻습니다. 자기 전에 몇명이 거쳐갔냐고. 네 명 째라고 답하는 그에게 돌아오는 답은 당신의 나이에 악기를 배우는 것은 무리라는 말입니다. 노년의 베일은 삶은 무기력합니다. 대학에서 20년째 같은 과목을 가르치고 있고, 그나마 이번 학기에는 강의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책을 써야 한다는 핑계, 또 이러저런 핑계로 계속 그런 삶을 살아가려 합니다.

그러던 중, 공동저자로 이름만 올렸던 논문 때문에 그는 코네티컷을 떠나 뉴욕에 가게 됩니다. 뉴욕에 있는 또다른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 곳에는 다른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시리아 출신의 타렉(하즈 슬레이만 분)과 세네갈 출신의 자이납(다네이 제케세이 거리라 분) 커플입니다. 그들은 중간의 착오로 인해 허락도 받지 않고 월터의 집에 살고 있었던 것 입니다. 월터는 그들을 그냥 내보내기에는 뭐해 집에서 머무는 것을 허락해 줍니다. 그로 인해 월터에게는 작은 변화가 생깁니다. 타렉이 연주하는 아프리칸 드럼을 보고 흥미를 느낀 그는 타렉에게 아프리칸 드럼을 배웁니다. 그러던 중 타렉은 지하철 역에서 불신검문을 당한 후 체포되어 이민국의 수용소에 갖히게 됩니다.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추방당하게 생긴 타렉을 위해 월터는 변호사를 찾는 등 노력을 하게 되고, 그러던 중 타렉의 어머니 모나(히암 압바스 분)가 그의 집을 방문하게 되면서 그는 그녀에게 호감을 갖게 됩니다.

영화는 한 노교수의 일상의 무기력한 삶의 변화를 그려나가다 타렉이 체포된 후 부터는 미국 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그 시선을 옮겨갑니다. 타렉은 지하철에서 아주 사소한 오해로 - 그 오해에는 그의 인종 문제도 결부된 - 인해 체포되고 불법체류자인 그의 신분이 드러나 수용소에까지 가게 됩니다. 그가 잘못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타렉과 자이납은 월터의 입장에서는 말그대로 느닷없는 방문객이었지만 월터는 그들을 받아들였고 그에게 마음을 열어 친구가 된 후에는 그들로 인해 삶의 새로운 경험과 활력을 얻게 됩니다. 수동적이고 지루하기만 그의 삶은 그렇게 변화의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앞에 들이닥친 또 다른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수용소 대기실의 벽에는 '미국의 힘은 이민자입니다'라는 포스터가, 면회실의 한쪽 벽에는 성조기와 자유의 여신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 모습과는 달리 아이러니 하게도 수용소는 타렉과 같은 이들을 미국인으로 받아들이는 곳이 아니라, 그들을 미국의 경계 너머로 쫓아낼 준비를 하는 곳입니다. 타렉은 배를 타서 자유의 여신상을 볼때면 처음 보는 것 처럼 좋아했다 자이납이 말합니다. ("대부2"에서도 꼴레오네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자유의 여신상이 보이는 것처럼)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이란 나라를 상징합니다. 자유와 기회와 희망이 있는 땅. 그렇기에 타렉은 그 땅의 은혜가 자기에게도 적용될 것이라 생각하고 그토록 좋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그에게 불법체류자란 신분으로 그를 가둡니다. 미국에게 그들은 월터에게처럼 변화를 이끌어줄 방문객이 아니라 테러인자를 지닌 의심스러운 불청객일 뿐인 것입니다.

비지터 비지터
같이 연주하며 기쁨을 나누던 이 둘 사이에 벽을 세운 것은...


리차드 젠킨스는 변화를 겪는 월터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연기합니다. 무뚝뚝한, 그리고 무기력한 60대 노인의 표정에서는 리듬감을 타며 흥미로움이 떠오르며, 어느새 부드러운 인상이 얼굴에 자리합니다. 리차드 젠킨스의 연기는 단순히 이야기에 따라 흘러가는 한 사람의 변화가 아니라 눈으로, 그리고 감정으로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인식하게 합니다. 그는 영화에서 그 자연스러움으로 보는 이를 끌어당깁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타렉의 소식을 듣고 분노하는 모습에서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것은 그의 연기에서 비롯합니다. 이런 젠킨스 와 함께 생동감 넘치는 타렉을 연기한 하즈 슬레이만 등 다른 연기자들과의  앙상블 역시 영화를 풍성하게 하는 요인입니다.

"비지터"는 인종을 초월한 우정과 사랑의 감정, 그를 통한 변화를 잔잔히 그려내면서 그들의 관계에 닥치는 현실을 통해 미국 사회의 실제 이면을 들여다봅니다. 월터가 겪은 변화가 크게 다가올수록, 비정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 역시 크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느껴지는 변화가 주는 희망의 기운 역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영화의 이러한 측면들을 흐트러지 않게 조율하면서 잔잔함 속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위트와 그러면서도 적절한 무게감을 잃지 않게 극을 유지하는 배우 출신 감독 톰 맥카시의 연출력도 눈에 들어옵니다.

P.S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주최한 '아카데미의 보석들' 프로그램을 통해 본 영화로, 국내개봉일은 미정입니다.

레이첼 결혼하다
"필라델피아", "양들의 침묵"의 조나단 드미 감독의 신작이 가족드라마라는데에서는 생소하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 다큐멘터리를 연상케하는 핸드 헬드 카메라를 사용한 촬영 방식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영화의 제목에는 레이첼이 등장하지만, 주인공은 레이첼이 아니라 앤 해서웨이가 연기하는 킴입니다. 약물중독으로 인해 재활원에 있던 킴이 언니 레이첼의 결혼을 앞두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며서 영화는 시작합니다. 킴은 가족 내에서 일종의 문제아라는 인식이 박혀있고, 가족은 그것들을 염두에 두고 조심하지만 자신에게 그런식으로 보이지 않게 신경쓰는 가족의 모습이 킴은 불편합니다. 또한, 9개월만에 돌아온 자신이지만 다른 이들의 관심은 모두 언니 레이첼에게만 가 있는 것이 내심 서운하기까지 합니다. 킴의 그런 불만들은 어느새 표출이 되고, 그것과 킴의 과거의 큰 실수로 인한 갈등이 결합되면서 언니 레이첼과 갈등을 빛게 됩니다.

핸드헬드 카메라를 이용한 다큐멘터리(혹은 일부의 홈비디오식 촬영)의 느낌과 결혼식날까지의 과정을 그려나가는 중에 일어나는 가족들의 갈등과 그것을 해소해나가는 모습을 보면 우스운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인간극장"이 떠오릅니다. 어디선가 '킴의 표정을 보라. 금새 울음을 터뜨릴듯 하다. 그런데 언니 레이첼은 그것은 알아채지 못한 듯 하다.'라는 이금희 아나운서의 나레이션이 어디선가 들려올 듯도 합니다. "레이첼 결혼하다"를 "인간극장"에 비유한 이유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통해 우리가 알면서도 흔히 잊고사는 가치를 일깨워준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 영화가 그리는 것은 예상하시겠지만, 가족구성원 사이의 이해와 용서를 바탕으로 한 가족애입니다. 오래된 갈등으로 인해 서로 다투고 험한 말이 오갈지라도 결국 서로를 끌어안고 포용할 수 있는 것도 결국은 가족이라는 것을 영화는 이야기합니다. 물론 화해란 것이 모두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차를 타고 떠나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킴의 뒷모습과 차를 타고 떠나는 킴을 바라보는 레이첼의 뒷모습을 보면(비슷한 구도의 이 두 장면은 밤과 낮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영화가 가족애를 통한 포용이란 것을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그것을 무조건 쉽게 해결되는 문제로만 여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영화의 핸드헬드 카메라는 말그대로 다큐멘터리적인 느낌을 갖게 하지만, 끊임없이 흔들리는 화면을 보노라면 그러한 화면이 결국 킴과 레이첼, 그리고 킴과 가족 구성원 사이의 알게모르게 드러나는 갈등으로 인한 불안감의 표출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의 불안감은 같은 카메라가 비추는 결혼식의 흥겨움과 대비되며서 도드라집니다. 가족구성원 사이의 미묘한 균열을 부각시키는 이런 연출의도와 더불어 배우들의 호연은 영화에 큰 힘을 불어넣습니다. 특히, 주연을 맡은 앤 해서웨이의 연기가 돋보입니다. 우리나라 여배우들에 적용되는 것 같은, 고작 담배 한모금 빠는 것으로 연기변신이라고 호들값 떠는 모습이 아니라 앤 해서웨이는 진짜 연기변신을 합니다. "프린세스 다이어리"로 주목을 받은 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성공으로 스타덤에 오른 앤 해서웨이는 그런 유형의 캐릭터들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를 이 영화에서 무리없음을 넘어 훌륭하게 소화해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배우의 단 한마디 혹은 찰나의 표정을 통한 감정의 전달을 인상깊게 기억하고는 하는데, 결혼식 직전에 돌아와 언니 레이첼과 마주한 킴의 얼굴 표정이 그러합니다. 이 영화에서 다른 것은 다 넘어간다하더라도 앤 해서웨이의 인상적인 연기는 분명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입니다.

P.S 시사회를 통해 미리 접한 영화로, 국내에는 오는 2월 26일 개봉합니다.


말리와 나
'플로리다에서 나는 결혼도 했고, 약간의 미친 증세가 있는 래브라도 리트리버(바로 말리다!)도 구해와 길렀다. 하지만 당시 나는 이 돌아버린 개가 내 삶에 얼마나 깊숙이 들어올지 알지 못했다.'

영화 "말리와 나"의 원작이 된 동명의 책에서 저자인 존 그로건이 밝힌 내용입니다. 책과 영화는 존 그로건이 아내 제니와 결혼 후, 아이를 낳기 전에 시험(?)삼아 기르게 된 말리라는 래브라도 종 개와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존 그로건이 책과 영화에서 누누히 밝히는 바대로 말리는 세계 최악의 개입니다. 하지만 그 개는 그로건 일가에서 절대로 빠질수 없는 중요한 구성원입니다.

영화는 책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말리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벌어지는 각종 에피소드들과 그 중간중간 존의 직업적 변화, 아이들의 탄생 등의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진행해 나갑니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을 늘어놓는 구조를 그대로 가져옴으로 인해 영화는 다소 산만한 구성으로 비춰집니다. 또한 그러한 영향으로 영화가 가지는 주제가 뚜렷이 드러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눈에 띄는 단점들을 알아차리는 관객의 이성적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은 애견이라는 감성적 코드입니다. 단순히 초반에 드러나는 귀여운 강아지의 모습이 아니라, 그러한 강아지가 커나가고 자연스레 가족의 한부분으로 자리하는 모습을 그리는 영화는 특히 애완견을 한번이라도 길러본 사람이라면 영화가 끝난후 촉촉한 눈가로 극장문을 나서게 하는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리와 나"는 북미에서 지난 크리스마스 시즌 개봉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발키리" 등을 제치고 2주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습니다. 2003년 포브스 기준 미국 내 애견이 6500만 마리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한 시장적 배경과 함께 영화가 가진 가족주의라는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요소들이 분명 이 영화의 흥행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입니다. 국내에도 200만 마리의 애완견이 각각의 가정에서 영화의 말리처럼 가족으로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이 영화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입니다.

배우 이야기도 했으면 좋으련만, 이 영화는 나이대 별로 다르게 말리로 출연한 개들에게 오웬 윌슨과 제니퍼 애니스톤이 주연을 빼앗긴 영화인지라...

P.S 시사회를 통해 미리 접한 영화로 국내에는 오는 19일 개봉합니다.


프로스트 vs 닉슨
"프로스트 vs 닉슨"은 언론이 해야만 하는 역할을 제시해주는 영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올바른 언론인의 모습에 대해 말하는 영화도 아닙니다. "프로스트 vs 닉슨"은 1977년 있었던 세기의 인터뷰를 통해 언론이 '할 수 있는 일'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의 제37대 대통령 리차드 닉슨이 대통력직을 사임합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자신이 행한 일을 인정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그가 헬기를 타고 백악관을 떠나는 모습을 중계한 방송은 큰 시청률을 기록했는데 그에 관심을 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영국 출신의 방송인인 데이빗 프로스트입니다. 그는 한때는 미국에서 TV쇼를 진행하며 잘 나가기도 했으나 이제는 영국과 호주에서 그저그런 쇼만 진행해나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는 닉슨의 인터뷰를 통해 주목받아 다시 재기를 꿈꾸려 합니다. '재기'. 이런 생각은 그만 한 것이 아닙니다. 프로스트의 인터뷰 제안을 받은 닉슨도 이를 자신의 정계 복귀 발판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대결을 앞둔 둘은 재기라는 점에서 같은 목표를 두고 맞붙게 됩니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프로스트는 우리가 흔히 이런 류 영화에서 생각할 수 있는 종류의 인물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런 종류는 진실을 밝히는 언론정의에 목숨을 거는 타입을 말합니다. 프로스트는 닉슨과의 인터뷰가 기록할 시청률이 우선은 가장 큰 관심입니다. 진실이란 시청자가 원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시청률을 나오게 할 수 있습니다. 보장된 시청률을 통해서야 광고를 따내 제작비를 충당하고 프로스트 자신이 다시 주목받을 수 있습니다. 그의 고민은 현실적입니다. 그런 프로스트가 인터뷰를 구상하게한 시발점인 시청률은 다른 의미로 대중적인 파급력을 뜻합니다. 흔히들 바보상자라고 부르는 TV는 그것이 제공하는 정보를 보는 이들이 믿게 하는 재주가 있으며, 그 보급은 동시다발적고 범위가 넓습니다. 닉슨도 그걸 주목한 것은 물론입니다. 총 네 차례로 계획된 인터뷰에서 세 번은 닉슨의 완승입니다. 심지어 닉슨에게 표를 던지지 않았던 스텝들도 그가 다시 나오면 표를 던지겠다고 말을 할 정도니 말입니다. 프로스트는 궁지에 몰립니다. 이 인터뷰란 그와 닉슨의 대결이고 승자는 오로지 단 한명 뿐입니다. '태양은 단 한사람에게만 비출 것이고, 다른 한사람은 암흑 속에서 잊혀질 것' 입니다. 모든 것을 건 프로스트는 마지막 인터뷰에서 닉슨을 궁지로 봅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누구도 듣지 못했던 말이 나오게 합니다. '내 실수요. 내가 정부시스템을 훼손했고, 나와 내 친구들, 그리고 국민들을 실망시켰소. 내 정치생명은 이제 끝이오.' 인터뷰 카메라는, 그리고 영화는 그 대답 후의 리차드 닉슨의 표정을 잡습니다. 그의 침통한 표정을. 영화는 이 장면을 TV의 가장 큰 죄악 혹은 속임수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인생 조차도 간략화시키고 요약시킵니다. 닉슨의 그 표정 하나에 미국인들이 듣고 싶었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시청자들에게, 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전달 됩니다.

"뷰티풀 마인드" 등을 통해 실화를 영화화하는데 재주를 보인 (그리고 나아가 아카데미의 입맛에도 맞춘) 론 하워드 감독은 "퀸"의 피터 모건의 각본에 더해 그런 자신의 솜씨를 선보입니다. 이번 영화는 일종의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극의 중간중간에 프로스트와 닉슨의 주변인물들의 인터뷰 형식을 취한 꼭지를 넣었습니다. 이러한 중간중간의 인터뷰는 극의 부가적인 상황을 효율적으로 정리해주고 때로는 전개과정에서 극을 유연하게 연결하는 역할을 하며 다큐멘터리 형식은 영화에 전체적으로 진실성을 강조해 줍니다. 영화는 이런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리면서도 적절히 극적인 상황을 유도하기도 하는데, 마지막 인터뷰 전날 프로스트에게 걸려온 닉슨의 전화를 통해서 인터뷰 자리에서 일종의 대결을 펼치는 두 사람에게서 동질성을 끄집어내기도 합니다. 그것을 통해 프로스트가 포기하고 싶던 상황에서 새로운 탈출구를 찾도록 유도합니다. 실화가 가진 힘과 적절한 극적상황의 덧붙임을 통해 영화는 주제와 흥미를 모두 잡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단연코 프로스트와 닉슨의 마지막 인터뷰일 것입니다. 한스 짐머의 스코어는 두 사람의 대결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닉슨을 연기해온 프랭크 란젤라가 설전 끝에 보이는 침묵과 그 눈빛, 눈동자의 움직임, 표정은 너무도 인상적입니다.

추가적으로 이 영화를 통해서 지금 시점에서 왜 닉슨인가? 라는 의문을 던져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 영화는 북미 쪽을 기준으로 하자면 부시의 퇴임을 앞둔 12월에 개봉한 영화입니다. 부시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한 닉슨보다도 못한 역대 최저수치의 지지율을 기록했습니다. 또한 많은 이들이 부시를 닉슨에 비유하며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영화에서는 닉슨 시기의 베트남전쟁과 캄보디아의 영상을 보여주며 '전쟁의 정당화 근거였던 베트남 내 공산군 사령부는 실제 존재하지도 않았다'라고 하는 장면이 부각되는데 이라크와 WMD를 상기한다면 이 영화와 부시의 관계에 대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영화 이면에 숨겨져있는 이러한 의미가 진짜 이 영화의 의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스터 부시에게. 당신이 지금은 닉슨이 헬기를 타고 그냥 떠났듯이 그렇게 텍사스로 가겠지만, 당신도 언젠가는 그 과오들을 인정하고 사과할 날이 올 것이오.'

영화가 끝이 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자연스레 우리의 현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아직 잘못을 사과는 물론 인정하지 않은 전직 대통령이 있습니다.

P.S 시사회를 통해 미리 접한 영화로, 국내에는 오는 3월 5일 개봉합니다.


작전
지난 학기에 정치경제학이라는 교양과목을 듣던 중 강의하시던 강사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식은 투자가 아니다. 그저 사람들의 욕망이 가득 담긴 도박이자, 투기다.' 영화 "작전"은 여러 사람의 얽히고설켜있는, 혹자들에게는 눈먼 돈이 떠돌아다니는 주식이라는 투기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선배의 말에 넘어가 큰 돈을 잃고만 현수는 집을 나와 좋게 말해 개인투자가, 흔한 말로 백수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는 5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주식거래에 능숙하게 되었고, 그를 통해 번 돈으로 생활을 하며 때로는 도박을 하기도 합니다.
영화는 초반에 도박판에 있는 주인공 현수의 모습을 통해서 도박과 주식을 동일 선상에 놓고 시작합니다. 도박판에서 믿을 건 자신의 운과 실력뿐이고,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패를 숨기고는 어떻게든 자기가 이겨 한탕 챙길 궁리에 바쁩니다. 현수가 작전주를 먹은게 발단이 되어 어쩔수없이 끼어들게 된 DGS 캐피털 황종구 사장(박희순 분)의 작전세력도 결국은 그러합니다. 여러 이들이 관여하고 있지만, 그들이 노리는 것은 공동의 몫이 아닌 결국은 자신의 몫이고, 그렇기에 서로가 자신의 계획을 숨깁니다.

주식은 흔히 타이밍이라고 합니다. 싼값에 매수해서 비싼값에 매도하는 그 타이밍. 조금만 늦어도, 그리고 조금만 빨라도 안되는 그 타이밍. 영화는 전체적으로 빠른 속도감을 보입니다. 속도감 있는 영화는 마치 주식판에서의 타이밍을 잡으려 끊임없이
계산하고 궁리하며 움직이는듯한 느낌을 줍니다만, 영화가 잡은 타이밍은 어느 순간부터는 과하게 빠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영화는 중반을 넘어서부터는 어느새 혼자서 저만치 달려갑니다. 빠른 속도감이 주는 경쾌함에 사로잡힌체 영화의 전반적인 상황이나 흐름을 관객에게 충분히 각인시키지 못합니다. 타이밍을 놓친 영화는 관객에게 현수의 작전이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그를 통한 있어야할 긴장감을 만족시켜주지 못하니 "오션스 일레븐" 같은 모습을 기대했으나, 결과는 "오션스 서틴" 같은 모습이라고나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영화는 주식이라는 현실적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마무리에서는 최근 한국영화 "마린 보이"와 같은 무턱댄 쿨함의 폐해를 답습합니다.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영화라 생각되어서인지 아쉬움이 큽니다.

주연 현수 역을 맡은 박용하의 연기는 그가 최근 "온 에어"에서 선보인 캐릭터와 그리 큰 차이점을 보이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분명 성격상 여러모로 다른 캐릭터임에도 그가 연기하는 현수는 "온 에어"의 이경민과 이상하리만치 겹쳐보입니다. 영화에서 눈에 띄는 것은 "세븐 데이즈"로 명품 조연 반열에 오른 박희순입니다. 결국은 현수가 이길 것이고, 황종구가 질 것이라는 눈에 뻔한 - 더군다가 그것을 포장해주어야할 긴장감도 없는 - 상황에서도 흥미로움을 유발하는 것은 박희순의 연기입니다.

P.S 극장의 문제인지, 아니면 한국영화의 고질적인 대사녹음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대사 듣기가 귀 쫑긋하고 듣기평가 하는 느낌입니다.

마린 보이
"마린 보이"는 저 푸른 바다 위의 팔라우에 그림 같은 집을 지어 살고 싶었던 수영강사 천수(김강우 분)가 도박판에서 모든 돈을 잃고 빚까지 얻어 목숨이 위태롭게 된 상황에서 시작합니다. 천수가 자신의 눈을 너무 믿었던 것이 패인이었습니다. 자신이 본 것이 옳다고, 자신이 옳다고 무조건적으로 믿게 되면 때로는 뼈아픈 결과를 내기도 하는 법입니다. 영화는 전반부에 많은 것들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그 패를 믿게끔(도박판에서의 천수처럼) 유도하고는 마지막에 그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역시나 천수처럼)

천수는 빚을 탕감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강사장(조재현 분)의 일을 돕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마약반 형사(이원종 분)가 강사장을 돕도록 하는 끄나풀 역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강사장과의 사이에서는 매력적인 유리(박시연 분) 때문에 갈등을 빚습니다.

영화는 소위 말하는 쿨한척을 하는 영화입니다. 주인공 천수는 목숨이 왔다갔다한 상황에서는 과도한 낙천스러움을 잃지 않으며, 영화가 비록 스릴러로서 잘 짜여진 영화인 것은 분명 아닌지라 그 점을 영화의 속도감으로 가리려 합니다. "무한도전" 찮은이형의 So~ Cool처럼 본인이 생각하기에만 제대로 쿨한 것 같다는게 문제이긴 합니다만. 찮은이형의 쿨함은 웃음을 주지만, 이 영화에서의 그런 쿨함은 그저 눈가리고 아웅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가 않습니다. 특히나 에필로그 격 결말의 내용은 어정쩡한 쿨함의 진수입니다. 영화 보고 남는 것이 극중 유리역의 박시연의 몸매 정도 밖에 없다는 것이 결국은 이 쿨함을 드러내는 또다른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볍게 즐기고는 잊어주세요. 그런 의도라면 어느정도 수긍이 가고, 대략 어느 선까지는 그에 부합하는 면을 보입니다.

영화는 제목과도 같은 '마린 보이'라는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는 않습니다. 영화 초반부에는 '마린 보이'라는 소재에 대해서 무언가 크게 다룰 것 같은 일면도 보이지만,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땅 위에서 벌어지는 캐릭터들의 과거 속 진실과 그로 인해 얽히고 엃킨 관계들, 그로 인한 갈등입니다. 사실상 일종의 카체이스, 총격씬 같은 일체의 액션장면은 거의 모두가 지상에서 이뤄지는데 이 것들은 극의 후반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전반부는 인물간의 갈등을 표면에 내세우다가 후반부에 들어서는 액션 장면들을 채워넣는데, 영화에 많은 것을 담으려는 노력은 십분 이해하겠지만, 돌연 변하는 전/후반부의 흐름은 눈에 걸립니다. 거기에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집어넣은 액션 장면의 규모나 그것이 주는 이펙트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많은 것을 담는 것이 아니라 담긴 것이 적더라도 그 하나하나를 가지고 빛나게 하는 능력이 아쉽습니다.

세븐 파운즈
한 남자가 911에 전화를 겁니다. 그리고는 앰뷸런스를 보내달라고 합니다. 사람이 죽었다고. 자신이 자살을 할거라고. 영화 "세븐 파운즈"는 후에 있을 어떤 결과를 보며우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러한 결과를 향해 흘러갑니다. 국세청 직원이라고 자신을 밝히는, 처음 시작에서 등장한 남자 벤(윌 스미스 분)은 눈이 먼 돼지고기판매원에게 전화를 걸어 시비를 걸었다 전화를 끊고 가슴 아파하고, 심장병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한 여자를 찾아가보기도 합니다.

그의 행동을 쫓고 있노라면 의문스러운 생각이 가득 듭니다. 국세청 직원인 벤은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걸까? 그가 어쩌다가 자살을 하게 되는 걸까? 그와 그의 친구가 이야기하는 계획은 무엇이길래 친구는 저리 힘들어하는 걸까? 시작에서 주어진 그가 자살을 결심한다는 동기를 영화는 마지막에서야  드러내 보입니다. 동기에 대한 의문을 감춤으로써, 그의 행동을 쫓으면서 어떤 긴장감을 형성하려고 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언제나 계획의 시작과 그 의도는 좋습니다. 정작 결과가 안 좋아서 문제지 말입니다. 영화는 시작한지 20분도 지나지 않아서 눈치빠른 관객이라면 벤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 단순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그 의도가 파악된 순간부터 영화는 의도했던 긴장감을 잃어버리며, 오로지 영화에서 기대했던 것은 그 긴장감이었던 것처럼 맥이 풀리고 지리한 이야기를 이어나갑니다.

영화에서 벤이 자살을 결심하고 그 계획을 실행하게 된 것은 일종의 죄의식으로 인한 괴로움과 속죄입니다. 그는 그러한 속죄를 위해서 직접 '착한 사람'을 찾아서 그들에게 선물을 줍니다. 그런데, 과연 착함/선함이란 것이 벤에 의해 판단될 수 있는 것일까요?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테스트를 위해 상대를 조롱하고 비아냥대면서 그의 성품을 알아보는 것일 뿐입니다. 그가 한 테스트를 합격한 사람도 있고, 탈락한 사람도 있습니다. 마치 그것과 같습니다. 산타클로스가 누가 착한 아이인지, 나쁜 아이인지 판단하는 것 말입니다. 벤의 행동과 그 기준은 보는 이에게 동의를 얻어내기에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충분히 예상했던 결말을 보기 위해 달려온 시간은 너무 깁니다. 의미도 없고, 지루합니다. 속죄를 결심하기까지 벤이 겪었을 절망과 심리적 고통은 영화에서 두드러지게 부각되지 않으면서 벤의 결심에 대한 동감도 불러내지 못합니다. 억지스러운 강요된 감동은 사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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