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분노의 핑퐁"은 헐리우드에서도 나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B급 코메디 장르의 영화입니다. 스포츠라는 소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벤 스틸러의 "피구의 제왕"이나 윌 페럴의 "블레이드 오브 글로리"를 떠올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 영화들만큼 웃기다거나 재밌지가 않다는 점이 걸리긴 하지만 말입니다.
때는 1988년 서울올림픽. 천재적인 탁구 실력으로 12세에 세계 재패를 눈앞에 둔 랜디 데이토나가 보입니다. 하지만,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그는 패하고 아버지를 잃습니다.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후, 과거의 귀여운 꼬마는 간데없고 헝클어진 머리에 배불뚝이 뚱보가 쇼무대에 서있습니다. 랜디는 그렇게 망가진체 세월을 보내고 있던 중 FBI의 요청으로 미스터 펭이라는 괴사나이를 체포하기 위한 작전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펭이 주최하는 탁구대회에 참가하는 것입니다.
이런 류의 영화들이 그렇기도 하고 이런 영화에서 관객들이 바라고 있지도 않듯이 이야기의 개연성은 별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황당한 상황이 전개되어 어떻게 웃겨줄지가 관건입니다. 영화의 주연인 랜디 역의 댄 포글러는 외모로만 본다면, 그리고 영국 하드록 밴드 데프 레파드의 음악에 맞춰 탁구채로 연주하는 흉내를 내는 것을 보자면 마치 잭 블랙과도 닮아보이지만, 잭 블랙에게서 웃음기를 싹 뺀 버전이라고 하면 좋을 듯 합니다.
이 영화에서 랜디 역의 댄 포글러가 결정적으로 웃기는 장면은 없습니다. 펭 역으로 등장해 괴상한 헤어스타일과 복장으로 망가져주는 크리스토퍼 월켄과 북한군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우리말 대사, "히어로즈"의 마시 오카의 카메오 등장 정도만이 아주 잔잔한 웃음을 제공해 줍니다.
웃음기가 쫙 빠진 코메디 영화 속 황당한 상황를 보고 있는 관객들은 그저 낯부끄러울 뿐입니다. 정형돈 씨는 안웃긴게 컨셉이라, 그리고 그 컨셉을 통해 역설적으로 웃기기라도 하지, 코메디 영화가 웃음이 없으면 이거 좀 문제있잖습니까.
P.S 사실 이런 류를 좋아해서 나름 개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에 보니 2월 5일 개봉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어서 예매하려고 찾아보니 없던 차에 애초 개봉일이었던 날에 시사회를 통해 보게 되었네요. 그럼 개봉은 언제일까요?
영화 "다우트"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1964년입니다. 그 한해 전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했으며, 미국의 제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암살당했습니다. 그리고 1964년, 바티칸에서는 카톨릭 역사상 두번 밖에 있지 않았던 공의회가 열립니다. 미국이나 카톨릭 모두 개혁과 변혁의 길을 걷는 시기였습니다.
영화는 뉴욕 브롱스의 성 니콜라스 카톨릭 학교의 알로이시어스 교장 수녀(메릴 스트립 분)와 플린 신부(필립 셰이모어 호프먼 분)의 갈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알로이시어스 수녀는 매사에 엄격하교, 규율을 중시합니다. 그녀의 그런 캐릭터의 성격은 등장과 함께 확실히 인지됩니다. 미사 중 플린 신부의 설교가 진행되던 중 알로이시어스 수녀는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는 아이들 주변을 걸으며 떠드는 아이, 자는 아이를 찾습니다. 아이들은 그녀의 등장만으로도 자세를 고쳐 앉습니다. 알로이시어스 수녀는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엄하게 굴면서 그들 위에 군림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입으로 그러한 모습을 원한다고 말합니다.
플린 신부는 알로이시어스 수녀와는 반대에 위치합니다. 그는 아이들과 자유롭게 이야기하며, 적극적으로 다가가 위로하고 보듬어 줍니다. 다른 신부들과의 식사 시간에 격의 없는 농담을 주고 받습니다. 교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으로 그는 '진보된 교육, 가족과 같은 교구'를 외칩니다.
서로 다른 성향의 둘은 결국 반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젊은 제임스 수녀(에이미 아담스 분)가 있습니다. 그녀는 플린 신부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편이긴 하나, 그녀의 의심은 플린 신부를 주시하고 있던 알로이시어스 수녀의 또다른 의심의 불을 지피고 그로 인해 플린 신부와 알로이시어스 수녀의 언젠가는 터질 싸움은 앞당겨집니다. 제임스 수녀는 알로이시어스 수녀의 생각과 행동에 절대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로이시어스 수녀를 막을 도리는 없습니다.
알로이시어스 수녀는 도널드에게 크게 관심을 갖는 플린 신부를 의심하며, 그를 학교에서 내쫓으려고 합니다. 그녀의 계획을 플린 신부는 눈치채게 되고 그녀와 큰 갈등을 빚습니다. 제임스 수녀는 알로이시어스 수녀에게 '플린 신부가 차에 설탕을 많이 넣어먹고, 연필이 아니라 볼펜을 쓰며, 유행가를 교회 행사에 쓰자고 해서 싫어하시잖아요.'라고 말합니다. 편협해 보이는 이유이긴 하지만, 그 자체는 신구의 대립적 양상을 드러내는데는 크게 효과적입니다. 신구, 혹은 진보와 보수의 갈등을 주욱 보건데 거기에 무언가 딱 떨어진 이유가 드러난 적이 많을까요? 아님 그 반대일까요? 아마 후자에 가까울 겁니다. 영화는 알로이시어스 수녀, 플린 신부, 제임 수녀의 의심과 그로 인한 반목이 두드러질 때마다 의도적으로 기울어진 앵글을 통해 그들을 잡습니다. 비스듬한 그들의 모습은 심히 불안해보입니다. 영화가 진행될 수록 알로이시어스 수녀의 의심은 점점 커지고 깊어집니다. 그로 인해 점차 관객들은 알로이시어스 수녀보다는 플린 신부의 편에 서게 됩니다. 물론 플린 신부에 대한 알로이시어스 수녀의 의혹이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에 대한 의혹이 영화 상에서 말끔히 해결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강하게 표현되는 알로이시어스 수녀의 캐릭터는 다분히 플린 신부에게 동점의 여지를 남깁니다. 또한, 둘의 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은 후, 영화의 앵글은 플린 신부와 반대편 벽의 성모 마리아상을 같이 잡습니다. 마리아는 과연 동정녀로서 예수를 낳았는가? 요셉과 마리아의 주변인들은 마리아를 의심했지만, 요셉은 마리아의 말을 믿었으며,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 영화는 다시 한번 신앙적 믿음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영화는 결과적으로 알로이시어스 수녀의 의심의 진실 여부에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과연 플린 신부는 알로이시어스 수녀가 생각한 그런 사람이었는지가 아니라 의심이 낳은 확신과 그 확신 자체가 가지고 오는 또다른 의심이며, 도덕적 믿음과 신앙적 믿음, 보수와 진보의 갈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입장을 지켜보는 관객들에게 공란인 답안지를 제공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의심이라는 하나의 갈등을 통해 다층적인 대립의 면을 드러내는 "다우트"는 영화의 배경이 비록 1960년대 당시의 사회상을 투영해놓고 있다하더라도 지금에 대입해봐도 결코 어색하지 않는 이야기로 변함없이 그 주제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메릴 스트립과 필립 셰이모어 호프먼, 그리고 에이미 아담스는 각각의 배역에 맞는 훌륭한 연기를 펼쳐보이며, 그들의 연기 앙상블은 환상적입니다. 특히나 메릴 스트립은 연기는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제임스 수녀가 반쯤 울먹이며 플린 신부를 옹호하자, 알로이시어스 수녀는 아무렇지도 않듯이 한마디 합니다. '앉아요' 그 한마디에는 무시할 수 없는 위엄과 권위가 실려있으며, 그녀의 표정, 목소리에는 알로이시어스 수녀의 존재 자체가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요 배우들은 모두 이번 아카데미에 연기 부문에 각각 노미네이트 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언급되지 않은 또 다른 배우인 바이올라 데이비스가 있습니다. 바이올라 데이비스가 맡은 역은 도널드의 엄마 역으로 그녀가 등장하는 부분은 영화 상에서 단 10여분에 그칩니다. 짧은 순간의 그녀 연기가 인상적이긴 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의 배역이 영화 상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입니다. 그녀는 알로이시어스 수녀에게 그녀의 확신이 바탕을 둔 이유에 강하게 의문을 제시하며, 인종과 동성애에 대한 사회 및 종교의 일면을 비춥니다. 짧지만, 그녀의 등장은 이후 갈등의 폭발의 전조로 작용합니다. 각색상을 제외하고는 오스카에서 모두 배우부문에만 노미네이트 된 "다우트" 인지라, 일단은 배우들의 수상에 있어서의 선전을 기대해봅니다.
P.S 프레스블로그에서 주최한 시사회를 고마우신 분의 양도를 받아 본 후 작성한 감상기입니다. 영화는 오는 2월 12일 국내 개봉합니다.
P.S2 세 명의 인물, 삼위일체, 성가정. 카톨릭 신자로서 신앙 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생각을 하게 합니다.
P.S3 김혜자 씨가 알로이시어스 수녀 역을 맡아서 공연했다는 국내 연극이 굉장히 궁금해집니다.
'"반지의 제왕" 뉴라인시네마의 판타지 3부작'. 영화 "잉크하트: 어둠의 부활"(이하 잉크하트)의 홍보문구입니다. 뉴라인시네마는 2012년 "호빗"의 개봉을 앞두고 있고, 그 때까지의 징검다리 역할을 할 판타지영화들을 준비해놨는데, "잉크하트" 그 중 하나입니다. 다른 하나는요? "황금나침반" 입니다. 원작소설을 "잉크하트"를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황금나침반"의 전례를 봤을 때는 분명 원작의 재미와 매력을 크게 반감시켜놓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어렵지 않게 해볼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 중심이 되는 소재는 소리내어 책을 읽으면 책 속의 캐릭터가 현실 세계에 등장하게 되는 '실버통'이라는 능력입니다. 책수선전문가인 '모'(브렌든 프레이저 분)는 이러한 능력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데, 그 때는 이미 자신의 아내는 책 속으로 들어가고, 대신 그가 읽은 '잉크하트'라는 책 속의 캐릭터들이 현실 속으로 뛰쳐나온 후였습니다. 모는 그 때부터 '잉크하트'라는 책을 하나 밖에 없는 딸과 같이 찾아다니며 10년을 보내고 마침내 한 헌책방에서 그 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을 책 속으로 돌려달라고 부탁하는 '더스트핑거'(폴 베타니 분)에 의해 또 다른 책 속의 캐릭터이자 악당 '카프리콘'(앤디 서키스 분)에게 붙잡혀가게 됩니다.
읽는 것이 현실이 된다는 소재 자체는 분명 흥미롭습니다. 영화는 그 소재를 이용해 유니콘이나 미노타우르스, "오즈의 마법사" 속 캐릭터들을 영화 속에 등장시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딱히 영화 속에서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단순히 '실버텅'이란 능력에 대한 소개 용도로만 그치고 맙니다. 영화는 크게는 카프리콘과 모, 그리고 모의 딸 메기와의 대결을 그리고 있는데 그 밖에 더스트핑거, 모의 이모 엘레노어, 또 다른 책 속에서 튀어나오게 된 파비오, '잉크하트'의 작가 등의 인물들이 그에 합세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복잡해집니다. 영화의 주배경은 카프리콘의 성으로 성에서 탈출했다 잠입했다 도망치다를 반복하는 단촐한 이야기에서 복잡스런 캐릭터들을 담아내기에는 무리입니다. 또한, 탈출과 잠입이란 면에서 기대할 수 있는 어떤 긴장감을 찾아보기에도 힘듭니다. 공간 자체가 제약적이라 영화의 스케일은 상당히 작게 느껴지며 사용되는 CG 역시 평이한 모습으로 시각적으로 매력을 뽐내지도 못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재미를 느낄 만한 요소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고, 어른들의 관심은 더욱더 끌지 못하는 영화 "잉크하트"는 "황금나침반"에 이은 뉴라인시네마의 또다른 판타지 실패작입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체인질링"은 "미스틱 리버" - "밀리언 달러 베이비" - "이오지마" 연작 같은 그의 최신작을 두고 보자면 범작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말마따다 그의 범작은 왠만한 감독들의 걸작 수준이란 것이 나름 의미심장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영화는 1920년대 말 LA에서 벌어졌던 믿을 수 없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화국에서 일하던 크리스틴(안젤리나 졸리 분)는 어느날 그녀의 9살 난 아들 월터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됩니다. 경찰에도 신고하지만 도움은 되지 못하고 그렇게 5개월이 지난 후 경찰은 아이를 찾았다며 한 아이를 그녀 앞에 세웁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크리스틴의 월터가 아니었습니다. 경찰은 사건을 종결하고 자신들의 업무능력에 대한 신뢰성을 위해서 억지로 크리스틴에게 월터를 떠 맡깁니다. 크리스틴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주장해오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공권력이란 이름의 폭압적인 올가미 였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근작들이 캐릭터의 행동에 대한 합법과 불법, 혹은 선과 악의 구분을 짓는데 있어서 의도적으로 모호한 위치를 견지하면서 그를 통해 캐릭터에 깊이와 풍성함을 자아냈다면, 이번 "체인질링"에서는 그 선과 악의 경계가 매우 뚜렷하게 갈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절절한 모성애를 바탕으로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는 크리스틴은 분명 선이고, 그런 크리스틴이 맞서게 되는 부패와 무능력의 온상인 LA경찰 및 LA 시, 그들이 휘두르는 공권력은 악입니다. 이 두 인물 혹은 집단 사이에는 다른 방식으로의 시선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기존과 같은 캐릭터를 연출해낼 수 있을 법도 했던 아동연쇄살인범 노스콧의 역할은 그저 살인을 행한 자로만 마무리를 짓고, 그래서 그의 살인행각이 드러나는 시점 이후부터는 관객들이 크리스틴을 향한 연민보다는 살인범에 대한 분노, 그리고 나아가서는 궁극적으로 영화상에서(그리고 당시 실제) 보여지는 공권력이라는 거대한 힘을 향한 분노와 증오를 일으키게 만듭니다. 물론 이러한 방식의 전개가 감독의 의도가 지나치게 뻔히 노출되는 모습이긴 합니다만 감독이 최종적으로 관객에게 인지시키려고 했던 메세지를 위해서라면 어쩌면 가장 나은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믿을 수 없이 부조리한 공권력을 향했던 분노는 경찰 반장 및, 경찰청장의 사임, 시장의 재선도전 포기 등의 일종의 해피엔딩으로 일단락되고 관객의 마음은 다시 크리스틴으로 돌아옵니다. '싸움은 먼저 걸지 않되, 마무리는 내가 한다'는 자신의 신념으로 끝까지 굽히지 않았던 크리스틴의 행동은 80여년이 지난 우리네 현실에 비추어봤을 때 과거의 그 순간과 다르지 않은 지금의 현실을 목도하고 있는 관객들에게 그 희망을 통한 의지와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번 영화에서 큰 기교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2시간 20여 분 동안 끊임없이 관객을 쥐었다 폈다하는 솜씨를 선보입니다. 사실 어쩌면 이 영화는 그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공력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영화일런지 모르겠습니다.
영화에서 주연인 크리스틴 역을 연기한 안젤리나 졸리는 아이를 잃은 모정을 말그대로 애가 끓게 연기를 하고 있는데 아마도 여러 아이의 엄마가 된, 그녀의 실제 생활과 무관하지는 않아보입니다. "원티드"에서 보여줬던 액션성 강한 섹시한 여전사의 모습에서 그와는 너무도 다른 어머니의 모습을 연기하는 안젤리나 졸리의 모습은 그런 대비를 인지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인상적입니다. 이런 안젤리나 졸리의 연기 뿐만 아니라 존스 반장 역의 제프리 도너번 등의 조연들의 출중한 연기는 이 영화에 매력을 느끼게 하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P.S 곧 개봉을 앞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또다른 연출(및 주연작) "그랜 토리노"가 기대됩니다.
전에 "적벽대전 1부"의 감상기를 적을때도 말씀 드리긴 했습니다만, 전 "삼국지"의 팬이 아닙니다. 그것이 정사든 연의든 말이죠. 가슴에 큰 야망을 품은 사나이들이 난세에 일어나 어쩌고 저쩌고 하는 내용은 별 관심도 없을 뿐더러, 대륙의 허풍까지 결합되면은... 이자저차해서 어릴적부터 별로 안 좋아했습니다. 이번 영화에 대해 "삼국지"의 팬이신 분들은 각색을 거치며 변경되거나 빠진 내용에 화를 내시기도 하더군요. 어차피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이후 후대에 수많은 개작들 및 게임 등이 등장하며 그 각각에 맞춰서 수정되고 변경되었기에 영화 "적벽대전"에게 정사나 연의와 똑같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덧씌울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그저 "삼국지"에 대한 또다른 이야기일 뿐이니까 말입니다.
영화에서 주가 되는 것은 전편에 이어서 주유(양조위 분)와 제갈량(금성무 분)입니다. 전편에서 서로의 우정을 나누었던 그들은 이번에도 서로 경쟁하며 또한 돕습니다. 제갈량은 10만개의 화살을, 주유는 조조군에 투항한 장윤과 채모를 없애는데 '내 손모가지, 아니 모가지를 걸지, 쫄리면 뒈지시든지.'(개그는 개그일뿐) 하는 장면은 그들의 그런 관계를 다시 한번 부각시키는 모습입니다.
전편이 바다를 뒤덮은 조조의 수많은 함대를 비추면서 끝나며 왠지 에피타이저만 먹고, 본 음식은 못 먹은듯한 허기짐을 느끼게 했는데, 사실 이번 영화도 그런 허기짐을 채워주기에는 부족한 편입니다. 아시아 최대 제작비 800억 이라는 것에서 기대할 수 있는, 스케일에서 오는 스펙타클함이 전적으로 부족합니다. 영화의 핵심은 결국 동남풍이 불고 이어지는 오의 화공 공격으로 이어지는 말그대로의 '적벽대전'일 것입니다만, 그것이 기대한만큼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화공장면은 그저 폭발의 연속일 뿐이고, 그와 함께 이어지는 지상상륙작전은 오우삼 감이 이런 대규모 전투씬을 연출하는데는 여러모로 취약하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주유, 손권들이 일개 병사들이랑 같이 상륙작전을 펼치는 황당한 모습이 거슬린다는 것이 아니라 대규모 전투장면을 구성하고 전개하는 과정이 밋밋합니다.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이 클라이막스가 기대치를 밑돌면서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감상도 실망으로 치닫습니다.
영화에서는 두 명의 여성이 부각되는데 손권의 동생 손상향(조미 분)과 주유의 부인 소교(린즈링 분)입니다. 다분히 남성들의 틈바구니에서 벌어지는 남성들의 이야기여서인지 그녀들의 모습은 더 눈에 띄기는 하는데 조금은 영화에 방해가 되는 모습입니다. 손상향이 맡은 역할은 조조군에 잠입해 있다 만난 손숙재와의 애틋한 감정을 통해서 거대한 전쟁에서 희생되는 일반 백성의 삶을 그려내는 것이었는데, 상향과 숙재의 그런 모습을 비추었다가 돌아오면서 '이 전쟁의 승리자는 누구도 아니다.' 라고 결말에서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진부하기도 하고 이 영화의 전체적인 지향점이 그리 시니컬하지도 않기에 뜬금없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소교는 홀로 조조군으로 가 조조에게 차를 대접하며 조조의 끝없는 욕망을 질책하며 공격의 시기를 늦추어 전쟁의 향방을 바꾸는 역할을 합니다. 거대한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소교의 이런 방식은 맥을 탁 풀리게 합니다. 아무리 큰 전쟁도 결국은 사소한 하나의 사건에서 그 승패가 갈린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봐도 자명한 일이긴 합니다만 이것은 영화일 뿐이고, 소교를 이용한 방법은 심하게 말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영화가 그리는 캐릭터들은 입체적이라기보다는 평면적인 쪽에 가까워서 캐릭터성의 기복이 큰 편이 아닙니다. 하지만 조조의 경우는 조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이 영화에서 적으로 설정되어 있는 조조이기에 비열하거나 악랄한 면이 부각되기는 하는데 열병에 걸린 병사들을 독려하는 장면들은 구성해놓은 캐릭터에서 분명 튀는 부분입니다. 악랄하면 악랄하게, 찌질하면 찌질하게, 다른 캐릭터들처럼 그냥 확실한 방향성을 잡고 가는게 더욱 나았을 듯 보입니다. 병사독려하는 모습말고도 다른 식으로 조조의 능력을 표현할 방법이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1편에 비해 2편이 어느정도 나아지기는 했습니다만, 여전히 극은 긴장감이 없이 늘어지며, 스케일은 기대할 수 없는, 제작비가 의심되는 모습이 되풀이 되는 "적벽대전 2 : 최후의 결전" 입니다. 오우삼 감독 일대의 프로젝트였다는 이 영화는 오우삼 감독에 대해 나쁜 의미로 되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가지게 합니다. 그가 과연 이 영화에 적합한 감독이었는가? 답은 아니다 입니다.
'난 자라면서 나찌를, 히틀러를 죽이고 싶었다.' 는 탐 크루즈의 말처럼 많은 이들은 알게모르게 히틀러라는 존재 자체를 증오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유럽 뿐만 아니라 아시아까지 미친 나찌의 파시즘적인 군국주의의 영향과 그로 인한 인류사에서 유래없는 희생들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히틀러에 대한 증오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역시 틀리지 않은데,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에서 뿐만 아니라 독일 내부에서도 자신들의 총통 히틀러를 세상에서 지우고 싶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영화 "발키리"는 역사 속에 기록된 독일 내부에서의 마지막 히틀러 암살 시도를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는 북아프리카 전장에서 일기를 쓰는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버그 대령(탐 크루즈 분)을 비추며 시작합니다. 히틀러의 광기가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유럽을 황폐하게 할 것이라고 우려, 히틀러를 막아야한다고 생각한 그는 그런 심중이 드러난 바람에 이 곳 전장으로 발령이 난 상태입니다. 그는 그 곳에서 적군의 기습 폭격으로 인해 왼쪽 눈과 오른쪽 손, 왼쪽 손의 손가락 두개를 잃습니다. 병원으로 후송을 오게 된 슈타우펜버그는 베를린에서 히틀러 암살 시도를 모의하던 또 다른 세력과 접촉을 하게 되고, 히틀러를 죽이기 위한 계획을 짭니다.
슈타우펜버그 대령이나 다른 이들이 히틀러를 죽이려는 이유는 영화에서는 간단합니다. 히틀러는 결국 독일을, 유럽을 전화로 모두 불태울것이다. 그러니 그를 막아야 한다. 다만 슈타우펜버그에 대해서만은 조금 더 디테일하게 들어갑니다. 슈타우펜버그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그리고 아이들과 해후합니다. 집에는 바그너 곡의 '발퀴레의 비행'이 울려퍼지고, 남자아이들은 척척 각을 맞추어 행진을 하는 척하고 딸 아이는 그의 군모를 쓰고 경례를 합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슈타우펜버그의 눈빛은 아버지의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공습에 슈타우펜버그와 가족은 지하실로 대피하고 울려퍼지던 '발퀴레의 비행'은 중단 됩니다. 영화 속에서도 히틀러를 통해 직접 언급되지만, 바그너의 저작활동은 게르만 민족의 신화를 완성화고, 그것을 통해 민족주의로의 결집과 나찌의 군국주의를 부추기는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에서 베트남 마을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하던 장면에서도 흘러나오던 그 곡은 군국주의의 상징이라는 공통적 함의를 가지고 영화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아이들의 사심없는 행동을 통해 영화는 나찌즘이란 악령에 사로 잡혀 있는 독일과 그것을 바라보던 한 아버지, 나라를 위하는 군인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암살 음모를 다룬 스릴러지만 장르적으로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에 두고 있고, 그로 인해 이미 이야기의 결말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히틀러를 죽이려 하지만 실패합니다. 히틀러는 그들의 손에 죽지 않았고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이는 "타이타닉"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감독 브라이언 싱어는 이에 대해 '관객들은 마지막은 알고 있지만, 이 특별한 이야기의 자세한 사항은 잘 모르고 있다. 그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합니다. 이미 "유주얼 서스펙트"로 브라이언 싱어가 자신의 재능을 입증하기도 했지만, 이 후 세 편의 코믹스 영화를 연출한 후 다시 스릴러로 돌아온 그는 여전히 그 재능을 잃지 않았습니다. 약점을 안고 있음에도 영화는 곳곳의 촘촘한 스릴러적인 기교로 극의 서스펜스를 불러일으킵니다. 특히 히틀러의 벙커와 외부 건물에서 히틀러 암살 시도 직전에 보이는 모습은 긴장의 끈을 팽팽이 잡아당깁니다. 영화는 영리하게 전체를 히틀러 암살 시도에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영화의 2/3 지점에서 폭탄이 터지고, 슈타우펜버그 대령 일행은 그들이 계획했던 발키리 작전을 이용한 베를린 장악 계획을 실행합니다. 그들의 계획은 성공할 듯 보입니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히틀러의 '내 목소리를 기억하나?' 한마디로 모든 것은 바뀝니다. '난 자라면서 나찌를, 히틀러를 죽이고 싶었다.' 그 바람을 영화는 이용합니다. 관객들은 슈타우펜버그들에게 동화되고 이미 역사를 통해 인지하고 있는, 예정되어 있는 그들의 실패와 그로 인한 몰락은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거기에 전반부와 같이 시침뚝 떼고 밀어붙이는 스릴러적 기교가 결합되면 또다른 의미의 서스펜스가 발생합니다. 치명적 약점을 오히려 이용하는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키리"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그리고 있는 영화이지만, 또한 우리가 몰랐던 역사적 사실을 인지하게 해주는 영화입니다. 나찌의, 히틀러의 광기 속에도 그 중심부에서는 이성적인 이들이 존재했고, 그들이 그들의 이상을 실행에 옮겼다는 것입니다. 영화는 그들의 실행을 흥미로운 스릴러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에드워즈 즈윅 감독의 신작 "디파이언스"는 2차세계대전 당시 나찌가 벨로루시를 침공했을 때 살아남기 위해 숲으로 도망쳐 유격대를 조직하고 나찌에 저항했던 비엘스키 형제와 유대인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영화는 시작부터 이 영화가 실화였음을 강조하면서 시작합니다. 실화이긴 하지만, 역시나 대부분이 그렇듯이 적당한 윤색과 덧칠이 가미해지게 됩니다. 이런 영화는 극적이어야 하고, 감동적이어야 하니까 말입니다.
영화는 쫓기는 유대인과 그들을 쫓는 나찌의 이야기보다는 숲 속에 조직된 유대인 거주지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지도자이자 맏형인 투비아(다니엘 크레이그 분)는 적들과 직접적으로 맞서기보다는 안전하게 생존을 유지하는 방향을 모색하고, 둘째인 주스(리브 슈라이버 분)는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파입니다. 결국 둘은 크게 싸움을 하게 되고, 주스는 자기 사람들과 함께 소련군에 가담하게 됩니다. 이 후에 이 둘의 이야기는 각각 따로 전개가 되며 투비아의 거주지에서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 안에서의 또다른 의견 충돌로 인한 갈등 등이 보여집니다. 하지만, 그 갈등이란 것이 어떤 큰 위협이나 고비로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그 부분부터의 영화의 전개는 늘어집니다. 더군다나 주요 갈등이라고 할 수 있는 투비아와 주스의 갈등 역시 갈등으로서의 역할을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영화에서 '살아남은 것이 최선의 복수다'라고 말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영화는 투비아 편이나 혹은 주스 편을 들어주고 있지 않습니다. 양시론도, 양비론도 아닌 엉거주춤한 영화의 시선은 극의 긴장감을 떨어뜨립니다.
영화 속에서 주요인물로 등장하는 투비아와 주스의 캐릭터 역시 큰 매력을 느낄 수가 없는데, 서로 상반되는 스테레오 타입의 인물로만 그치기 때문입니다. 이런 캐릭터들 사이에서 완충제로 작용할 캐릭터의 부재와 이런 스테레오 타입의 캐릭터들을 이용한 갈등조차 제대로 못 이끌어낸 영화의 시선은 이 캐릭터들에 대한 흥미를 거둬갑니다.
처음 시작과 같이 실화 바탕 영화의 공식이라 할 수 있는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다'를 사진과 자막으로 표기하며 마무리되는 "디파이언스"는 그러한 공식들처럼 그저 뻔한디 뻔한 감정만을 남겨놓습니다.
"파이트 클럽", "세븐", 그리고 "조디악"을 통해 거장의 길로 한발 다가간 데이빗 핀처의 신작,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은 "위대한 개츠비"로 유명한 F. 스콧 피츠제럴드가 그의 나이 26세 때 쓴 동명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국내 출판명은 벤자민 버튼의 흥미로운 사건입니다.)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이 시작과 함께 오고, 최악의 순간이 마지막에 온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마크 트웨인이 한 말에서 영감을 받은 피츠제럴드는 노인의 몸으로 태어나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이 갈수록 젊어지는 한 남자의 인생을 한 편의 블랙코메디로 완성했습니다.
이 소설의 모티브인 나이를 거꾸로 먹는 사내는 충분히 흥미있는 소재로, 영화화를 위한 준비는 지금으로부터 10년도 훨씬 이전인 1994년 여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매릴랜드 필름 오피스의 회장 잭 저브스가 피츠제럴드의 이 단편소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후 영화화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98년에 들어서입니다. "뷰티풀 마인드", "신데렐라맨"의 론 하워드가 연출을 맡고, 잠정적으로는 존 트라볼타를 주인공으로 해서 프로젝트가 진행되었습니다. 이후, "꿈의 구장"의 필 알덴 로빈슨, "카핑 베토벤"의 아그네츠카 홀랜드가 이 작품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으며, 2000년에는 "존 말코비치 되기"의 스파이크 존즈와 "이터널 선샤인"의 찰리 카우프먼의 조합과 이후 게리 로스 감독을 거쳐 2005년에 최종적으로 데이빗 핀처 연출에 "포레스트 검프"의 에릭 로스 각본으로 제작이 확정됩니다. 브래드 피트와 케이트 블란쳇이 주연으로 캐스팅 된 후, 영화는 2006년 가을부터 촬영에 들어갑니다.
(앞서 말했듯이) 원작이 일종의 블랙 코메디물이었다면, 에릭 로스가 맡은 각본은 남들과는 다른 인생을 살았던 한 남자를 통해 사랑과 삶, 그리고 죽음에 대한 애가(哀歌)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에 '테크니션'이라는 말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데이빗 핀처가 결합하면서 아름다운 판타지 멜로영화가 탄생했습니다.
벤자민 버튼은 1918년 11월 11일, 1차 세계대전 종전일 밤에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하지만 80세의 노인과 같은 모습으로 태어난 그는 그것에 충격을 받은 아버지의 손에 의해 우연히 한 양로원에 버려져 그곳에서 자라납니다. 어린(?) 시절을 그저 양로원 안에서 보낸 벤자민은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어느새 알아가지만, 데이지 라는 한 소녀를 통해서 남들과 같은 애뜻한 감정을 깨닫습니다. 이 둘의 만남은 벤자민이 양로원을 나와 세상을 경험하고, 세월이 흘러감에도 계속 되고 그들은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데이지는 다른 이들처럼 나이가 들어가고 벤자민은 점차 젊어지고, 나아가 어려집니다.
"에일리언3"부터 시작되어 "세븐", "파이트클럽" 등을 거쳐 "조디악"까지 이어진 데이빗 핀처의 연출 필모그래피는 스릴러라는 장르로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판타지 멜로인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단연 눈에 띌 수 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다루지 않았던 장르에 따른 약간의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데이빗 핀처는 한층 더 성숙된 스토리텔로서의 능력과 이야기와 결부된 CG 등의 특수효과를 절묘하게 활용하는 능력을 십분 발휘해 역시 '데이빗 핀처'라는 말이 나오게 합니다. 166분의 근래에 유래없이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을 스크린으로 빨아들이는 솜씨는 놀랍습니다. 긴 러닝타임에도 관객을 붙잡아 두는 그의 능력은 장르가 비록 다를지라도 이미 "조디악"(156분)에 선보인 적이 있으니 어찌보면 그리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장르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는 핀처의 그간의 모습을 어렵지않게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생아부터 청년까지의 벤자민 버튼을 브래드 피트 혼자서 연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CG입니다.
특수효과로 유명한 ILM의 경력과 CF와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의 데이빗 핀처는 "에일리언3", "세븐", "파이트클럽",
"패닉룸" 등의 매 작품마다 영화에 그 시대의 첨단기술을 접목해 왔습니다. 이번 영화에서 벤자민 버튼을 있게 한 기술은
'컨투어'(Contour)라는 것으로 실사 배우의 얼굴 표면을 캡쳐하는 기술입니다. (좌측 동영상 참조)
데이빗 핀처의 말로는 브래드 피트가 아기까지 연기하게 하려고 했으나 제작비가 바닥이 나 그럴 수 없었다니 하니, 1억 5천만 불에 이르는 이 영화의 제작비가 일견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첨단 기술을 깔끔하게 이야기와 결부시키는 능력은 단연코 핀처의 그것입니다. 기술적으로 이 영화는 "조디악"에 이어 바이퍼 카메로 촬영되었습니다. 바이퍼 카메라는 필름 카메라에 비해 광량이 부족한 상태에서도 무리없이 촬영을 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혹자들은 "조디악"에서 보이는 변화 중 하나로 이 바이퍼 카메라의 사용으로 인한 화면의 질감 변화를 꼽기도 합니다. 이번에 촬영을 담당한 클로디오 미란다는 핀처가 "조디악"에서의 바이퍼 카메라 사용을 너무도 마음에 들어해 이번에도 사용을 하게 되었으며, 자신도 특히 어두운 장면을 촬영할 때 그로 인해 수월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미란다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장면은 매음굴 장면이라고 하는데 그 장면에서 느껴지는 질감과 색감이 마음에 들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한밤에 데이지가 안개 낀 호숫가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극중에서 데이지는 '무용은 몸의 라인이 생명이다'라고 말하는데, 어둠과 안개 속의 실루엣이 무척이나 아름답더군요.)
또한, 이 영화에는 "조디악"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당시의 분위기를 잘 살린 시대극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물론 "조디악"이 모든 것이 사실에 기초한 이야기였고, 이 영화는 벤자민 버튼의 판타지적인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만 1918년 부터 현재까지 거슬러 올라오면서 보여지는 다양한 배경의 모습은 아름다운 시대극이라고 불러도 별반 무리는 없어보입니다. 바이퍼 카메라의 사용은 이런 시대극이란 분위기에, 그리고 판타지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데 큰 효과를 냈습니다.
핀처에 대한 이야기만 했지만 사실 각본을 맡은 에릭 로스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영화는 현재의 데이지와 벤자민 버튼의 일기장을 통해 과거를 불러내는 플래시백을 이용한 전개를 통해 벤자민 버튼의 삶을 탄생부터 순차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벤자민 버튼은 그의 특별한 삶을 살아가면서 2차 세계대전의 전투를 경험하기도 하고,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호황으로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큰 돈을 번 아버지의 사업체를 이어받기도 하는 등 역사의 순간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과 첫사랑 여자의 존재, 영화에서 언급되는 이야기는 '인생은 쵸콜릿상자같은 것이다. 어떤 쵸콜릿을 먹게 될지 모르니까.' 라고 말하던, 로스에게 오스카 각본상을 안겨준 "포레스트 검프"를 자연스레 떠오르게 합니다. 이런 유사성은 에릭 로스 본인도 인지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외려 자신이 '왜 이 작품이 "포레스트 검프"와 비슷한가?'라고 묻습니다. (물론, 계속 그런 말을 들었기 때문도 이유일테지만요.) 그는 몇몇 요소나 틀이 비슷한 것은 명백하나, 이야기가 더욱 더 개인적인 점 등에서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다른 이들이 이 영화로 인해 "포레스트 검프"가 생각난다고 한다면, 굳이 문제 삼을 생각은 없다. 다만, 그들이 이 영화를 통해 분명 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포레스트 검프"와 관련된 질문은 감독인 데이빗 핀처 역시 받았고,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포레스트 검프"? 난 이 영화는 ("포레스트 검프" 처럼) 평범한 남자가 특별한 상황에 직면하는 것 대신에 벤자민 버튼이라는 특별한 남자가 아주 평범한 상황을 겪어나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얼마의 관객이 극 속에서의 브래드 피트처럼 나이를 거꾸로 먹어 인생을 마무리 하는 삶과 연관되어 있을지 나는 모르겠다. 내가 의도한 모든 것은 처음부터 그리 하이 컨셉이 아니었다. 둘에서 동질성을 느끼는 이유는 모두 매우 극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그들의 첫키스와 사랑에 빠졌던 사람을 기억하지 않는가.
둘 사이의 유사성은 분명하지만 이들의 말처럼 두 영화는 분명 일정부분 차이가 있는 영화이고, 그로 인해 느끼는 감정 역시 다릅니다. 눈 앞의 현실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검프를 통해 삶의 살아가는 이유와 그 원동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리고 미국의 소시민상을 포레스트로 대변시켜 역사의 현장을 관통하면서 그 가치를 두드러지게 그린 것이 "포레스트 검프"라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영화 속 벤자민의 양어머니 퀴니의 '운명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고, 그러한 운명과 함께 하는 삶은 가는 길은 다 다를 지라도 종착지는 다 같다.'라는 말처럼 죽음이란 공통의 종착지를 향해 가는 인생 속에서 나이를 거꾸로 먹는 벤자민 버튼이 겪는 여러 보편적인 경험(주변 사랑하던 이의 죽음, 이성에 대한 사랑, 그리고 죽음 등)을 통해 탄생과 죽음을 아우르는 전체 인생에 대해 고찰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외모상으로는 노인일 뿐이지만, 벤자민 버튼에게는 아이의 호기심과 이후에는 젊은이의 끝없는 열정이 가득합니다. 이러한 신체적 나이와 정신적 나이의 차이라는 역설적인 상황을 통해서 영화는 신체의 노화로 규정되는 나이가 결코 인생의 족쇄로 작용할 수 없음을, 품은 마음과 열정을 잊지 않는다면 누구나 그 때 그 순간의 젊음으로 살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영화에서 데이지의 할머니는 벤자민에게 '젊어지는 약이라도 먹는 것 같다.'라고 말합니다. '젊어지는 약'. 그 답은 영화에 있습니다. 영화에는 물론, 벤자민과 데이지의 사랑이 두드러지만 그 조차도 역시 인생의 한 부분입니다. 일종의 유사성이 혹시라도 이 영화를 폄하할 이유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영화에는 두 주연배우 브래드 피트와 케이트 블란쳇이 있습니다. 이미 이번 골든글로브 시상식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지만, 어린시절부터 청년까지 벤자민을 연기하는 브래드 피트의 모습은 충분히 인상적입니다. CG와 분장이 눈을 사로잡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 각 나이대의 벤자민을 연기하는 것은 브래드 피트 본인이고, 그 연기는 극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시각적 효과와 결합하면서 비현실적인 이야기임에도 영화에, 그리고 벤자민 버튼 캐릭터에 일종의 현실감을 부여합니다. 그의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데이지는 벤자민과는 반대의, 우리와 같은 삶의 시간을 사는 캐릭터입니다. 그에 따라서 그녀는 젊은 숙녀에서부터 나이가 들어 병상의 노인이 됩니다.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리는 두 사람이지만 흘러가는 시간에 맞춰 나이가 변해가는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있어서 케이트 블란쳇 역시 브래드 피트 못지 않은 연기를 선보입니다. 철없고 도도했던, 그리고 무대에서 아름다운 무용으로 명성을 떨치던 젊은 여성에서 나이가 들고 젊은 벤자민 앞에서 자신의 나이든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중년의 여성, 그리고 노인까지.
데이빗 핀처의 일곱번째 연출작,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이전작 "조디악" 만큼이나 그의 행보에서 눈에 띄는 작품입니다. 잠시 언급했던 장르를 떠나서도 인생에 대한 이번 영화는 그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이질적인 작품입니다. 그런 이질적인 느낌이 영화에도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닙니다. 변함없이 핀처는 뛰어났습니다. 이번 영화는 자신의 솜씨가 다른 장르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는 것을 증명해보고 싶었던 데이빗 핀처의 야욕의 발로가 아니었을가 생각해봅니다. 그 야욕이 낳은 결과물에 대한 답은? 데이빗 핀처라는 이름은 결코 실망을 주지 않습니다.
P.S 프레스블로그에서 주최한 국내최초 시사회를 통해 본 작품입니다. 국내 정식 개봉일은 오는 2월 12일입니다.
P.S3 그래도 전 "조디악"이 더 좋았습니다. 데이빗 핀처의 차기작은 맷 데이먼 주연으로 그래픽노블을 원작으로 해 2010년 개봉예정인 "네스"(Ness)입니다. 클리브랜드 공공안전요원이 된 미 재무부 요원이 은퇴한 경찰과 함께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예, 스릴러입니다. LoL
P.S4 엄밀히 말하면 원작에서는 나이를 거꾸로 먹는 남자라는 모티브 정도만 동일할 뿐 분위기나 이야기의 주제면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각본을 쓴 에릭 로스 역시 이점을 밝히고 있는데, 다른 수많은 작가들이 이전에 각기 다른 방향으로 이 작품에 접근을 시도했었고, 그렇기에 자신 역시 과연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봤다고 합니다. 그것은 소설이 시작된 계기인 (본문에도 있는) 마크 트웨인의 말이었고, 그로 인해 탄생된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는 소재였다고 합니다.
샘 멘데스의 네 번째 연출작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어쩌면 그의 연출 데뷔작이자, 그에게 오스카 감독상을 안겨주었던 "아메리칸 뷰티"가 말하는 그것과 유사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메리칸 뷰티"는 아메리칸 드림이 표방하는 전통적 미국 가정상의 이면을 들여다보며 그 붕괴를 그리고 있었고,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그 때로부터 50년 전의, 모두가 바라던 이상적인 아메리칸 드림의 표상과도 같았던 한 가정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아메리칸 뷰티" 보다 더 무거운 분위기입니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리처드 예이츠의 1961년작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고 하지만 국내에는 출판되지가 않은 것 같아서, 그래서 읽어보지를 못했던지라 이 감상기에서 원작과의 비교는 생략됩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듯이 이 영화에는 주연으로 10년 전 "타이타닉"으로 전세계를 사로잡았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이 커플로 캐스팅 되었습니다. 이러한 캐스팅은 이 영화의 이야기와 무관하면서도 또한, 관련이 깊습니다. 타이타닉은 비록 1912년 북대서양에서 침몰했고 잭과 로즈는 이별했지만, 많은 분들은 그들이 살아남아서 사랑을 이어나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바람과 상상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어쩌면 영화는 그 점을 다분히 이용하고 있습니다. 배경이 비록 1950년대이지만, 잭과 로즈가 결혼해 부부가 되었고, 아이들도 낳았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상적인 모습은 영화의 타이틀이 뜨기도 전에 산산조각 납니다.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와 연기수업을 받고 있는, 배우를 꿈꾸는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 분)은 한 파티장에서 만나 서로 반합니다. 그들의 대화는 무척이나 즐거워보입니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에이프릴은 한 연극 무대에서 서 있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연극에 대해, 그리고 그녀의 연기에 대해 호의적이지 못합니다. 프랭크는 낙심한 에이프릴을 위로해보려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풀어지지 않습니다. 10년 전 안타까운 사랑을 나눴던, 그리고 단 5분전 서로 한눈에 반했던 두 사람에게 지금 남은 것은 그들 사이의 거리감입니다. 그 거리감은 둘이 걷던 복도에서도,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보입니다. 결국 둘은 한바탕 말다툼을 합니다. 그들은 잭과 로즈도 아니고 조금 전까지 풋풋하고 행복해보였던, 시작하는 연인들도 아닙니다. 그들은 '휠러' 부부입니다.
이들 휠러 부부는 외양적으로만 본다면, 이상적이고 행복한 가정입니다. 그들은 코네티컷 교외의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위치한 정원이 딸린 2층집에서 두 남매를 기르고 있는 전형적인 미국적인 가정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그런 모습은 당연하면서도, 부러워할만한 모습입니다. 그들에게 이 집을 소개한 헬렌(케시 베이츠 분)이 그들을 입에 닳도록 칭찬하는 모습에서도 그런 면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프랭크는 자신의 직장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에이프릴은 자신의 배우로서의 꿈을 접고 그저 집안일만 하는 것에 허망해합니다. 그들이 처음 '레볼루셔너리 로드'로 이사왔을 때의 삶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게 둘은 처음의 행복했던, 꿈에 가득했던 모습과는 달리 삶에 지쳐가고 서로 갈등을 빚습니다. 그 때 에이프릴이 프랭크에게 제안을 합니다. 파리로 가서 새로운 삶을 살아보자고. 프랭크는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결국 에이프릴의 말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들은 그 때부터 그들의 이러한 계획을 주변에 알려갑니다. 하지만, 주변의 반응은 그들의 계획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이웃인 밀리와 그의 남편 솁도 그렇고, 프랭크의 직장 동료들도 그러합니다. 그들은 모두 당황하고, 휠러부부의 계획이 비현실적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프랭크와 에이프릴은 오히려 그들의 부정적인 반응에서 희열을 느낍니다. 그들은 새로운 희망에 부풀었고, 그래서 즐겁습니다. 주변인물들이 모두 휠러 부부의 계획에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웃이자 휠러네에게 집을 소개해준 부동산 중개인 헬렌(케시 베이츠 분)의 아들 존(마이클 섀넌 분)만큼은 에이프릴의, 휠러네의 계획을 지지해줍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존이 정신병원 신세를 지던 중 잠시 외출을 나온, 정신적으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휠러 부부네의 현실이 그러했습니다. 휠러 가정은 앞서 말했듯이 누가봐도 안정적인 가정입니다. 남편인 프랭크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아내 에이프릴은 전업주부로 집안일을 하며, 두 남매를 키웁니다. 교외의 한적하고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그들의 이층집을 보노라면 전형적인 미국들이 바라는 그런 삶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은 행복하고, 또 행복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이 꺾인 에이프릴에게 그 곳은 아무런 희망도 없고, 의미 없는 공간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에이프릴은 시대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그녀에게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그 삶보다는 파리에서의 새로운 삶과 도전이 진정 의미있는 삶인 것입니다.
하지만, 프랭크의 회사 일이 의외의 방향으로 잘 풀리면서 프랭크는 결국 좀 더 높은 지위, 높은 연봉에 갈등하고 새로운 희망을, 의미를 찾아나서려는 에이프릴의 탈출구를 결국 막아섭니다. 안정적인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도전은 결국 그렇게 서로 직접 맞닥뜨리고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영화는 휠러 부부를 통해서 안락하고 희망적으로만 보이는 '아메리칸 드림'이란 시대적 가치가 때로는 공허하기 그지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메리칸 뷰티"에서 아내 캐롤린이 이태리제 실크 소파를 챙기자, 남편 레스터가 '그것은 그저 소파이고, 지금 당신은 제대로 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더 높은 직위의, 더 좋은 봉급을 선택한 프랭크와 달리(하지만 그도 그것이 진정 좋은 선택이 아님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는 그와 상관없이 아무런 희망도 없는 에이프릴의 삶은 '아메리칸 드림'을 부정합니다. 그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입니다. 또한, 마지막에 헬렌이 휠러 부부를 회상하며 그들의 뒷담화를 하는 것에서 그 가치의 허황됨은 더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이미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남여주연상으로 노미네이트 되었긴 하지만, 주인공을 맡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는 인상 적입니다. 10년 전 아름다웠던, 안타까웠던 사랑을 나누던 연인에서 이제는 갈등을 빚는 두 부부의 모습을 연기하는 그들은 그 과거를 모두 잊게 만듭니다. 봉합되지 않은 갈등의 위태로운, 그리고 깊어지는 골과 그 파국을 그들은 연기하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존을 연기한 마이클 섀넌은 그 캐릭터의 존재 자체가 가지는 의미 외에도 무거운 극의 중간중간에서 잠시의 가벼움으로 극을 유연하게 하는 몫을 톡톡합니다. 영화는 등장하는 배우들의 앙상블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샘 멘데스가 그리는 교외의 가정은 분명 평안해보여야 할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서로 감정적으로 대립하고 그래서 폭발하고, 그러다 다시 잦아드는 휠러 부부의 모습은 분명 따스하게 창안으로 비쳐드는 햇살마저도 불안하게 보이게 합니다. '타이타닉 커플'의 갈등처럼 이상적인 대상의 내면에서 느껴지는 그 불안감을 영화는 좇고 있습니다.
P.S 배급사의 시사회를 통해 미리 본 영화입니다.
P.S2 "레볼루셔너리는 로드"는 북미에서는 지난 12월 26일 제한상영으로 개봉했으며, 국내에서는 2009년 2월 19일 개봉예정입니다.
전편 "마다가스카"가 아주 좋았던 영화는 물론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볍게 즐기기에는 크게 무리가 없던 작품이었습니다.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의 특징 중 하나인 호화로운 성우 캐스팅을 통해 드러나는 각 캐릭터들의 개성을 보는 재미도 있었구요. 하지만 3년 만에 돌아온 속편 "마다가스카 2"는 오히려 전작보다 더 퇴보한, 나오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속편이 되어버렸습니다.
영화는 전편에서 이어집니다. 마다가스카를 고물비행기를 타고 탈출한 뉴욕 동물원 출신의 사자 알렉스, 얼룩말 마티, 기린 멜먼, 하마 글로리아와 마다가스카에서 만난 킹 줄리안, 그리고 우리의 펭귄 4총사들은 고장으로 인해 아프리카 한복판에 떨어지고 맙니다. 뉴욕 4인방은 말그대로의 자연인 아프리카를 보며 그들 핏 속에서부터 이끌리는 고향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알렉스는 그곳에서 자신의 부모와 조우하게 됩니다.
영화는 크게 보면 사자 알렉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개성을 잃어버려 고민하는 마티와 그로 인해 겪는 알렉스와의 갈등, 글로리아를 향한 멜먼의 사랑, 야생에서조차 생존본능을 발휘하는 인간들들과 밀렵꾼이란 존재를 통한 환경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킹 줄리안과 좌충우돌하는 우리의 펭귄 4총사 이야기들은 주변부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알렉스의 이야기는 영화의 중심을 잡기에는 흡입력이 약하고, 나머지 서브 플롯들은 촘촘하지 못하고 따로 놉니다. 제대로 된 이야기의 구심점의 부재와 받쳐주는 이야기들의 조합이 실패하면서 영화는 난잡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전편에서 큰 활약을 펼쳤던 펭귄 4총사는 이번 편에서도 열심히 활약을 하고, 나름의 웃음을 줍니다만 이전과 같은 빅웃음을 주기에는 미미하고, 영화의 전체적인 유머의 흐름도 아동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성인유머를 지향한다고 하기에도 뭐한 어정쩡한 위치에 존재합니다.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매너리즘을 비꼬면서 자신의 세를 불려나갔습니다. 하지만, 이번 "마다가스카 2"는 오히려 드림웍스 애니가 디즈니의 그런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모습입니다. 최근의 "쿵푸 팬더"의 성공이 있긴 하지만, 이전 "슈렉3"도 그렇고 다시금 자사 애니메이션에 대해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P.S 얼마전 개관한 왕십리CGV에서 IMAX로 감상했는데, 용산CGV에 비해서 스크린이 참 크더군요. "다크나이트" IMAX를 왕십리CGV에서 1월 말 재개봉한다던 것 같은데, 기대가 됩니다.
홍보사 측에서 시사회 자리를 제공해 주셔서 본 영화입니다. 그렇다고 딱히 감상문에 영향은 없습니다.
영화 "버터플라이"는 한 노인과 8살 꼬마 아이의 동행을 다룬 영화입니다. 그들(정확히는 노인)의 여행 목적은 아름다운 나비, 이자벨을 찾기 입니다.
쥴리앙(미셸 세로 분)은 나비 수집가로, 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들을 가슴 한켠에 품고 쓸쓸이 살아가는 노인으로 그 아들이 보기를 바랐던 나비 '이자벨'을 찾기 위해 매년 짧은 여행을 떠납니다.
엘자(클레어 부아닉 분)는 9살 즈음이 된 꼬마 소녀로 빨간 머리에 주근깨, 그리고 그 조그만 입에서 또박또박 나오는 말을 듣노라면 마치 '빨간머리 앤'의 어린시절을 보는 듯한 모습입니다. 그러고보니 올해 100주년을 기념해 어린시절을 다룬 애니가 나온다고 한 듯한...) 아빠 없이 엄마와 함께 사는 엘자는 일 때문에 바쁜 엄마 때문에 외롭고 속이 상합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만남을 갖게 된 (같은 건물에 사는) 쥴리앙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가 여행을 떠날 때 몰래 차에 숨어듭니다. 그렇게 이 둘은 짧은 여행을 함께 가게 됩니다.
고집 센 노인(혹은 어른)과 한 철부지(그러나 때로는 나이를 넘어선 영악함까지 가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는 사실 많습니다. 이 영화는 그러한 이전 이야기들이 가진 상투성에서 그렇게 크게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충실히 그러한 상투적인 면을 따른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이야기의 짜임새가 좋은 영화도 분명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그 단점을 크게 지적하지 않고 즐겁게 볼 수 있는 것은 영화가 크게 무리수를 두지 않는 안정적인 가족영화를 지향하고, 또 그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줄곧 쥴리앙과 엘자의 대화를 통한 유머를 바탕에 두고 이야기를 전개해나갑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흐르는 (두 주인공이 부른) 노래 'Le Papillon'의 가사 '- 예쁜 꽃들은 왜 지나요? - 그것도 그들의 매력이거든. / - 왜 악마와 하느님이 있어요?-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얘깃거리가 되어 주려고.' 처럼 아이의 호기심 가득한 질문에 대답을 주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입가에는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집니다. 거기에 꼬마의 나이답지 않은 영악함에는 '불행한 아이들은 조숙하려 든다'라며 엘자가 주는 웃음 뒤의 페이소스도 잊지 않습니다. 이런 영화의 배경으로 펼쳐지던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은 웃음과 더불어 한층 더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스크린 상에 비쳐지는 화질이 그리 좋지 않음이 그로 인해 더 아쉽긴 하지만...)
너무 무겁지도, 그렇다고 마냥 가볍지도 않은 가슴 따뜻해지는 웃음을 주는, 그리고 엘자의 귀여움으로 무장된 영화 "버터플라이"는 가족영화라는 카테고리에서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디즈니가 최초로 3D 애니메이션을 자체 제작했던 "치킨 리틀" 부터 2007년의 "로빈슨 가족" 까지는 전통적인 셀 애니메이션으로 쌓아왔던 디즈니의 명성답지 않은 작품이었습니다. 실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것은 한때는 공생관계였으나 지금은 한지붕 아래 같이 하게 된 픽사를 보면 더더욱 비교되는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디즈니는 극약 처방을 내렸습니다. 픽사의 수장 존 라세터를 "볼트"의 총제작자로 선택한 것입니다. 존 라세터는 인터뷰에서 처음 디즈니 스튜디오로 내려왔을 때의 모습이 다른 헐리우드 스튜디오와 마찬가지로 책임자가 리드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는 그 것을 바꿨다고 합니다. 애니메이터들이 그룹별로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개진하고 그 중에서 괜찮은 것은 작가에게로, 작가는 그것을 바탕으로 각본을 쓰고 작가는 그것을 감독에게 제시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픽사의 그것이겠지요?
결과적으로 보면, 디즈니가 존 라세터를 선택한 것으로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영화에는 픽사 그리고 존 라세터가 이루어내었던 결과들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놀라운 캐릭터, 극적 재미, 액션, 감동 등이 말입니다. 언제나 부족했던 디즈니 3D 애니메이션에게 더할 나위 없는 플러스 효과를 내었습니다.
영화는 TV쇼에서 슈퍼독으로 살아오던, 그래서 그것이 진짜인줄 알지 가짜 쇼인 것은 모르고 살아오던 저먼 셰퍼드 종 강아지 '볼트'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볼트는 사고로 스튜디오를 벗어나 뉴욕에 홀로 떨어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진짜 세계를 경험하면서 자신이 그냥 일반 강아지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헤어진 자신의 주인 페니를 찾아 미국 대륙을 횡단합니다. 영화는 어떻게 보면 디즈니판 동물 "트루먼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트루먼 쇼"와 "볼트"는 미디어 관련 강의나 사회사상사 관련 강의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실제가 없는 가상을 실제로 그리고 현실로 받아들이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현상을 풀이하는 이론 중 하나인 그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두 영화는 의도적으로 미디어에 의해 조작된 TV쇼라는 상황 속에서 그 모든 것을 현실로 믿고 있는 캐릭터들이 주인공입니다. "트루먼쇼"에서는 짐 캐리가 맡은 트루먼이었고 이 영화에서는 귀여운 저먼 셰퍼드 종 강아지, 볼트입니다. 분명히 같은 소재를 가지고 하는 이야기이지만, 두 영화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트루먼은 시뮬라르크를 깨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지만, 볼트는 분명 가상의 쇼임을 알고 그 안에서 벗어나지만 그 가상의 쇼 안에는 다른 허상들과는 다른 페니가 있고 그녀에게로 볼트는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미튼스가 '볼트' 광고판 앞에서 볼트에게 말하듯이 그 안의 쇼가 모두 허상이라면 "트루먼쇼"가 되겠지만, 페니라는 존재로 인해 그렇게 까지는 가지 못합니다. 흔히 그 이론에서 대표적으로 꼽는게 '디즈니랜드'라는 존재인데, 디즈니가 만든 애니매이션에서 그 모든 걸 부인할 수야 없었겠지요.
영화는 그렇기에 그런 점에서의 부각보다는 쇼와 현실에서의 차이를 볼트가 깨달아가는 과정을 유머러스한 상황으로 풀어가며, 볼트-미튼스-라이노의 로드무비 적 성격을 강화시키면서 그들의 우정과 용기, 페니와 볼트의 사이에서 반려동물과의 애정을 드러내는데 주력합니다. 이런 회피가 꼭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른 것은 아닙니다. 영화의 주력 연령대를 생각하면 적절한 선택이기도 하고, 영화가 애초에 바라보던 방향이 서로 다른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이야기가 사실 디즈니의 전문 분야지인지라(꾸준히 욕도 먹지만) 뻔한 이야기이지만 그럼에도 질리지 않고 웃으면서 적절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존 라세터가 한 이 영화에 대해 언급 했던 것 중 월트 디즈니가 항상 말했다던, '모든 웃음을 위해서는 그 안에 눈물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충실히 수행해 나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앞서 존 라세터를 언급했듯이, 영화의 이야기가 식상함에도 즐겁게 했던 것은 디즈니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분히 존 라세터와 픽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초반 카체이싱 장면의 스릴은 "인크레더블"에서의 그것, 유기동물의 슬픔을 나타내는 미튼스의 시퀀스는 "토이 스토리2"에서 제시를 떠올리게 하며, 영화에서 보여지는 유머들은 픽사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것들이 이 영화를 매끄럽고 풍성하게 만든 장본인들입니다.
이 영화는 디즈니가 최초로 성공적으로 만든 3D 애니메이션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성공 이후에는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습니다. 디즈니가 3D 애니메이션에서 픽사의 영향과 아우라없이 독자적으로 혼자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그것입니다. 픽사와 디즈니가 지금은 같은 지붕 아래서 살고 있지만, 미래는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렇기에 어쩌면 "볼트"는 디즈니가 픽사의 노하우를 배우기 위한 그 첫 단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P.S 본문에 언급한 미튼스와 관련. 미튼스와 볼트가 다투고 난 후, 미튼스의 표정에서 바로 이 노래와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P.S2 그놈의 고집때문에-_-(디지털 3D 자막으로 보고 싶다는..) 3D디지털 더빙과 디지털자막을 둘 다 봤는데....더빙도 나쁘지가 않네요. 오히려 자막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생략이나 이런 부분이 더빙에서 더 적게 발견되더군요. 영화 자체가 연령대가 높지 않은 대상을 염두해 두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요. 둘 중에 고민이시라면 3D 디지털 더빙 추천해드립니다.
유하 감독의 신작 "쌍화점"의 제목은 고려속요 '쌍화점'의 그것입니다. (예전 교과서에서 전체를 본 기억이 없으니, 아마도 이름만 언급되었나 봅니다.) '샹화점에 샹화사라 가고신댄 회회(回回) 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만두집에 만두를 사러 갔는데 몽고인 남자가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속요는 고려시대의 문란했던 성문화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이 노래를 더러운 것 취급했다고 하더군요. 영화 "쌍화점"은 색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원나라의 간섭에 시달리던 고려 말기의 왕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10년간 동거동락하며, 동성애를 나눠온 왕(주진모 분)과 호위무사 홍림(조인성 분), 그리고 원나라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후사가 필요했기에 왕의 명령으로 홍림과 동침을 하게 되는 왕후(송지효 분)가 극을 이끄는 캐릭터들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개인적으로 우려가 되었던 것이 왕과 홍림의 위와 같은 관계에서 오는 그들의 감정의 흐름을 제가 좇을 수 있을까 였습니다. 전에도 한 감상기 속에서 이야기했는데 동성애자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해하지는 못하는 쪽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퀴어 성향이 있는 영화를 감상하는데 좀 무리가 따르는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우려가 불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영화가 그리는 왕의 캐릭터 묘사가 애초에 그런 우려를 가질 만큼 충실히 쌓여나가는 것도 아니었고, 왕의 캐릭터도 그렇고 왕과 홍림의 애정묘사도 그저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딱 그런 모습에 그치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의 동성애자인 왕은 그저 주체할 수 없는 소유욕에 사로 잡힌 광기를 선보이는데, 영화에서는 정작 그의 감정의 묘사가 소홀히 되면서 어떤 사랑에 대한 갈증보다는 그저 비정상적인 인물로 밖에 비춰지지가 않습니다. 홍림과 왕후의 이성애의 대비로서는 저런 비정상적인 광기가 유용했을지는 몰라도 말입니다.
그에 비해 홍림과 왕후의 관계는 오히려 과하게 자세합니다. 일생을 왕 밖에 모르던 홍림이 왕후와의 관계를 통해 동성애자가 아닌 이성애자로서의 자신의 성정체성을 찾아가고, 멋모르던 색으로 시작했던 감정이 사랑으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그려나갑니다. 이런 이성애는 적절한 반복으로도 그 변화의 감정을 이끌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그것이 육체에 대한 탐닉이든, 마음 속 사랑이든) 영화는 이후로 갈수록 좀 과하게 홍림과 왕후의 관계를 묘사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위 높은 노출씬을 보여주기 위한 불필요한 반복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말입니다. 또한, 성공적인 롤모델을 따라간다는 것이 안정적이긴 하지만 홍림과 왕후의 관계에서 "색,계"에서의 그 색과 계의 충돌이 빚는 상황을 너무 유사하게 끌고 가는 모습은 조금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왕의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부족했던 것은 영화가 결국 홍림과 왕후의 관계에 더 치중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영화는 등장하는 새 캐릭터가 각 축을 담당해 견고하게 돌아가야 하는데, 한 쪽은 너무 취약했고, 다른 쪽은 그와 반대로 과잉이었습니다. 실패한 캐릭터 묘사는 결국 영화 전체적으로 해악으로 작용하는데 중후반부 부터 영화가 늘어지는 것도 홍림과 왕후의 관계에 대한 부차적인 느낌이 들 정도의 반복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기자/VIP 시사회에서 후반부가 늘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개봉판은 뒷부분을 손질했다고 하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그것은 후반부의 이야기의 밀도 자체가 초중반과는 다르게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하 감독의 근작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등으로 인한 기대감은 결국은 실망감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극의 전체적 흐름에 있어서 다른 이야기로 인한 긴장감보다는 노출에서 오는 긴장감이 더 컸고 그 노출이 적합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의문, 그리고 반복되는 노출로 무감각해지지기 시작한 모습에서 느껴지던 지루함은 결국 영화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또한 이야기보다는 영화가 더욱 중요시했으나 의도했던 바람대로 자리 잡지 못한 캐릭터와 함께 말입니다.
P.S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여자연기자들이 굳이 노출을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여자 연기자가 벗는다는 것은 결국 여자연예인이 벗느냐 아니면 여배우가 벗느냐로 평가가 나눠지는데 그 평가 자체가 한끝 차이의 모 아니면 도식의 위태로움을 가지고 있으며, 요즘 같은 영화계 상황에서는 감독이든 제작자든 여배우가 연기를 위해 벗는다는 모습보다는 여자연예인이 벗는, 그래서 관객의 호기심과 관음증적 시선으로의 유도를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관객이 드니까요. "미인도" 정도의 영화에 그 정도 관객이 든 것은 김민선이라는 여자연예인이 벗었기 때문이지, 김민선이라는 여배우가 벗어서가 아니니까요.
영화 "이스턴 프라미스"는 팬들이 이름 붙이길 전작 "폭력의 역사"에 함께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폭력 2부작'이라고 부르는 작품입니다. "폭력의 역사"에 이어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폭력이란 주제를 바탕으로 다시한번 의미심장한 영화를 만들어냈습니다. "폭력의 역사"와의 관계성은 단순하게는 주연배우에 있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폭력의 역사"에서 폭력이 수반된 악행에 젖어살던 과거를 잊고 평범한 가장으로 살아가던 톰 스톨을 연기했던 비고 모르텐슨이 이번 "이스턴 프라미스"에서는 러시아 마피아단의 운전수인 니콜라이 루진 역을 맡아 열연을 선보입니다. 혹자들은 데이빗 크로넨버그가 뒤늦게 자신의 페르소나를 만났다고도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가 결코 틀린 것 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폭력의 역사"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곳에서의 충격적인 살인 장면으로 그 시작을 엽니다. 차이가 있다면, "폭력의 역사"가 대낮이었다면, 이번 영화의 시작은 비내리는 저녁이라는 것입니다. 영화는 폭력이라는 하나의 큰 주제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폭력의 역사"와 때로는 유사하게, 그러다가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영화는 영국 런던의 러시아 마피아와 운전수 니콜라이(비고 모르텐슨 분), 그리고 한 병원의 간호사인 안나(나오미 왓츠 분), 그녀가 지키려고 하는, 마피아보스의 강간으로 인해 잉태되어지고 태어난 후 혼자가 된 여자 아이의 존재를 통해 통해 극을 전개시킵니다. 영화 상에서 그리는 러시아 마피아의 모습은 일견 "대부"의 그것과 비슷해 보입니다. 한쪽에서는 딸의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지만 어두운 방안에서는 밀담이 오고가던, 조카의 세례식장에서 악을 멀리하겠다고 하던 마이클의 모습과 대조되는 살인 장면처럼, "이스턴 프라미스"의 러시아 마피아단도 속과는 다른 겉을 가지고 있습니다. '트랜스 시베리아'라는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지만, 실상 그들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어둠의 일을 합니다. 이런 그들과 달리 안나네는 평범한 일반 가정입니다. 이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두 집단이 여자 아이, 크리스틴이란 존재의 접점에서 만나게 되고, 그 곳에서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 갈등 사이에 니콜라이 루진이 존재합니다. 니콜라이는 역시 러시아 마피아처럼 이중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중적 면모가 드러나는 순서는 반대입니다. 마피아(정확히는 보스)의 모습이 처음에는 포장된 선이었고, 이후에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면, 니콜라이의 처음 모습은 애초부터는 악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 포장된 악으로 후에 그의 진짜 정체가 드러납니다. "폭력의 역사"에서는 톰 스톨이 마주하고 다시 인정하고 정리하려는 과거의 모습을 통해 폭력의 끊어지지 않는 고리를 이야기했다면 "이스턴 프라미스"에서는 서로 다른 이중성의 그늘에서 펼쳐지는 폭력을 통해서 그 서로 다른 의도에 따라 각각의 폭력에 정당성이 부여되어질 수 있는가를 이야기합니다.
영화에서는 러시아 마피아의 특징 중 하나로 감옥에서 새기는 문신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문신이 그 사람의 '삶의 기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니콜라이 역시 몸에 문신이 가득하고, 영화 도중에는 마피아에 정식으로 입회를 하게 되면서 새로운 문신을 몸에 새겨넣습니다. 그 추가된 문신은 또다른 그의 삶의 기록입니다. 영화 상에서는 삶의 기록이라는 의미의 또다른 요소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상처입니다. 영화는 지속적으로 폭력으로 인한 상처를 클로즈업합니다. 처음 이발소에서의 그것, 시체의 절단된 손가락, 아짐의 조카 목에 깊이 난 상흔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곧 직접적 사인 등으로 판명될 그 사람 삶의 마지막 기록입니다. 그리고 문신이 곧 몸에 행하는 또 다른 종류의 폭력이라고 봤을 때 이 둘은 기록과 폭력이란 점에서 동일합니다. 이러한 요소가 극대화되는 것은 바로 사우나 장면입니다. 알몸이라는, 그 자체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니콜라이의 몸에는 칼이 그어집니다. 알몸으로 피를 범벅을 한 체 바닥을 나뒹굴고, 처절하게 생존을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니콜라이를 담은 이 장면은 말그대로 전율을 일으킵니다. 니콜라이는 가득한 문신 위에 상처라는 타의적인 폭력이 그의 몸에 남긴 기록을 가지고 살아남습니다.
영화는 말미에 안나네의 평화로운 모습을 비춰지면서 밝은 면을 보이지만, 다음 장면에서 어두운 식당 안에 홀로 앉아있는 니콜라이를 비춥니다. 바로 전 장면과 달리 극도로 어두운 분위기는 순간 섬찟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섬찟함은 니콜라이의 향후 모습이 결코 안나네의 모습이 주는 그것과는 같은 방향으로 가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습니다. 결국 니콜라이도 새롭게 새겨지는 문신과 상처처럼 점점 폭력이라는 어둠에 몸을 맡길 것 같은 그런 예감을 말입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폭력의 역사"에 이어 "이스턴 프라미스"로 아직도 그가 할 말이, 할 일이 남은 감독이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의 영화가 주는 전율과 긴장을 다시 한번 느낄 날을 기다려봅니다.
P.S 메가박스유럽영화제에서 한번 보고, 그 후에 정식개봉 후에 한번 더 봤음에도 사우나 장면은 정말 후덜덜합니다.
영화 "트로픽 썬더"는 '뻥의, 뻥을 위한, 뻥에 의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라? 당신, "매직 아워"에 대해서도 그런 이야기했잖아? 두 영화는 거짓말로 시작된 사건이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주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는 점에서 참으로 닮은 영화입니다. 그리고 영화 안에서 영화를 만든다는("매직 아워"는 그조차도 가짜고, "트로픽 썬더"는 나름 진짜 영화를 만든다고 하는 차이가 있지만 후자 역시 결국은 시작하자마자 그게 물건너가니) 공통점도 있고 말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트로픽 썬더"는 풍자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트로픽 썬더"는 역대 최고의 제작비를 들여서 만드는 베트남전쟁 배경 영화가 통제할 수 없는 배우들과 신인감독의 어리숙함으로 위기에 봉착하자 그 해결을 위해 배우들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그들을 진짜 정글에 던져놓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 어쩌면 시작부터 풍자라는 점을 공고히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의 본편이 나오기 전에 광고 및 영화 속 주연 배우들의 이전 영화 트레일러를 틀어줍니다. 이는 곧 등장할 배우들의 캐릭터를 사전에 설명해주는 역할도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목적성, 실제 영화관에서 관객이 영화를 보는 과정(본편 상영 전, 광고를 보고 다른 영화 예고편을 보고, 또 광고를 보고 또 광고를...CGV는 이짓을 무려 10분 가까이!)을 영화상에서 반복하면서 이 영화의 실제성을 강조하는데, 곧이어 실제 본편에서 펼쳐지는 영화 제작과 그에 관련된 주변 이야기, 황당한 상황과 모습들은 그러한 임의대로 만들어진 실제성이 진짜 현실에 대한 메타포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트로픽 썬더"는 현실 풍자를 위한 메타 영화입니다.
액션영화 속편만 찍어나가며 스스로의 가치를 하락시키고, 연기력에 대해 비판을 받는 액션 스타, 화장실 코메디로 유명한 마약중독의 코메디언, 메소드 연기에 스스로를 바친 배우, 정신없고 어처구니 없는 영화 제작 환경, 윽박지르는 영화제작자, 거기에 배우에게 위성TV를 안달아줬다고 두꺼운 계약서를 들이밀며 화내는 배우의 매니저까지... "트로픽 썬더"는 영화 속의 영화를 통해서 현실을 비꼬고 조롱하면서 웃음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이에 더해 영화 속에서의 배우들의 반목과 갈등,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시끌벅쩍한 대사와 각종 상황으로 인한 폭소도 더해져서 "트로픽 썬더"는 말 그대로 빅웃음을 주는 코메디로 영화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이는 메인급의 배우들이 아닙니다. 물론 그 메인급 인물들도 자신의 몫을 단단히 하지만, 정작 가장 큰 인상으로 자리잡은 것은 뚱뚱한 대머리 영화제작자로 분한 탐 크루즈입니다. 단단히 분장한 그의 외모적 특징 뿐만 아니라, 그의 저질(?)는 신선한 충격과 웃음으로 다가옵니다. 탐 크루즈를 이렇게 만들다니... 감독이자 주연을 맡은 벤 스틸러의 인맥과 파워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
"트로픽 썬더"는 골든글러브 남자조연상 후보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탐 크루즈의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코메디에 냉정한 아카데미가 그를 조연상 후보에 올릴지도 미지수고, 설사 노미네이트 된다해도 히스 레저를 제치기에도 버겁습니다. 이런 상들이 중요는 하겠지만 설령 수상을 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출연했던 "트로픽 썬더" 겁나게 웃겼던 영화라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스콧 데릭슨 연출,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영화 "지구가 멈추는 날"은 로버트 와이즈 연출의 동명의 1951년작을 리메이크한 작품입니다. 그 영화를 보지를 못한지라(고트가 서 있는 스틸사진을 보기는 했습니다만) 비교는 저만치로 던져놓겠습니다.
영화는 외계존재들의 대표하는 클라투(키아누 리브스 분)가 지구를 살리기 위해 인류를 멸종시키기 위해 지구에 오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헬렌 박사(제니퍼 코넬리 분)를 통해 그의 결정을 돌리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는 어찌보면 시작부터 식상합니다. 외계에서의 이상 물체가 지구로 다가오는 것을 알게된 미국 정부는 자국내의 과학자들을 모두 소집해서 그에 대한 대응방안을 모색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에 대한 대응은 제대로 이루어지기 않고, 이상 물체는 센트럴파크에 안착합니다. 인간들은 그에 대응을 하기 바쁘지만, 그 안에는 외계인 클라투와 거대 인간형 괴물체 고트가 있었습니다.
클라투는 지구인, 그 중에서 헬렌 박사와 교감하면서 그녀에게 자신은 지구를 살리기 위해 왔다고 말합니다. 지구가 죽으면 인간도 죽지만, 인간이 죽으면 지구가 산다고, 인간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지구를 살리기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영화 상에서는 어떤식으로 하나를 꼭 집어서 인간이 지구에게 미치는 해악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지금도 살아숨쉬면서 벌이는 쓰레기 및 공해물질로 인한 환경파괴일 수도 있고, 영화 상에서도 언급되는 파괴적인 본능 자체로 인해 전쟁 등을 통해 자체적인 멸망 과정에서 지구에게 끼치는 해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가까울지는 보는 사람의 판단마다 다르겠지요. 결국 계획대로 인류멸종계획은 실행에 옮겨지고, 고트가 변한 나노로봇들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갑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이 난관입니다. 이 거대한 재앙이 어떻게 비켜갈 것인가. 영화는 인간이 멸종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어느새 인간을 가족처럼 사랑하게 됐다는 외계인과 멸망이라는 막바지 길에서 새로운 깨달음과 변화, 도약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과학자, 그리고 헬렌과 그녀의 의붓아들의 사랑을 통해서 클라투가 계획을 변경했노라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 세가지 이유를 개별로 놓고도, 그리고 합쳐서 놓고 보더라도 앞서 말한 거대한 재앙의 해결책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심하게 미흡합니다. 벌려놓은 일에 비해 마무리가 허접하리 만치 부실한 모습입니다. 차라리 외계인들이 갑자기 미생물들때문에 지구 정복에 실패하고, 살아남은 가족은 행복하게 재회한다는 "우주전쟁"의 마무리가 나아보이는 지경이니까 말입니다. 식상한 이야기 구조에, 역시나 진부한 주제와 허술한 마무리까지 겸비한 영화는 헐리우드 블럭버스터에 기대할 수 있을 시각적인 효과도 평이한 수준입니다. 이야깃거리, 볼거리도 아무 것도 없는 영화는 제목처럼 그대로 멈춰버리게 하고 싶은 모습입니다.
이에 비한다면, 키아누 리브스는 극 중에 인물에 적합한 모습입니다. 그것은 '매니 빙 매니'에 빗대어 '키아누 빙 키아누'라고 불리우는 그의 일관된 무표정한 표정과 말투에서 기인합니다. 감정의 기복을 느낄 수 없는 외계인 같다고 할까요. 네오도 그랬고, 콘스탄틴도 그랬고, 클라투도 그렇고 지구를 구하는 인물들은 다 저래야 하는 건가한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에 비한다면, 제니 코넬리의 캐릭터가 크게 두드럼이 없는 이런 류에서의 전형적인 캐릭터이고, 윌 스미스의 아들인 제이든 스미스가 맡은 제이콥 역은 이 영화에서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요인 중 하나입니다. 아버지 타령은 아이의 아픔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그것이 반복될 수록 귀에 거슬리는 칭얼거림으로만 들릴 뿐이고, 더불어 외계인을 물리치자는 주장 역시 아이의 귀찮은 투정으로만 들릴 뿐입니다. 다른 분들이 말하는 "미스트"의 광신도 아줌마, "스피드 레이서"의 막내와 침팬지에 이은 올한해 3대 짜증 캐릭터 중 하나라는데 깊이 동감합니다.
북미 쪽에서는 크리스마스가 있는 주말을 두고 나름 짱짱한 영화들이 맞닥뜨렸는데, 국내에서는 동시개봉은 커녕 이 영화만 걸려있다는게 그저 분통 터집니다.
P.S 23일, CGV 측의 전산실수로 IMAX DMR 2D 조조를 4000원에 볼 수 있었다는 것만이 위안입니다.
영화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는 애초에 이 디지털 3D 상영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그렇다보니 그냥 일반 상영으로 이 영화를 본다면, 심하게 그저그런 어드벤쳐 영화물로밖에 비춰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3D로 본다고 눈에 확 들어오는 영화도 아니긴 합니다만...
영화는 지질학자 트레버(브랜든 프레이저 분)가 10년 전 실종된 형의 발자취를 조카(실종된 형의 아들)와 함께 따라 아이슬란드로 향하고 그곳에서 산악가이드 한나(애니타 브리엠 분)의 안내를 받게 되는데, 그러던 중 지구 속 세계로 떨어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습니다.
앞서도 살짝 언급했지만 영화의 내용은 그렇게 흥미가 가는 편은 아닙니다. 그냥 딱 액션어드벤쳐 물의 틀안에서의 평이한 전개에 예상가능한 단순한 결말까지...또한 지질학자니, 지진계니 뭐니 과학적인듯하게 말하고 있지만, 이런 류 영화가 그렇듯이 과학은 그저 포장입니다.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생각해보세요. 수마일을 추락하다가 지반의 미끄럼틀 같은 곳에 안착해서는 물에 퐁당 빠지고(온몸이 산산조각나야 마땅한데) 공룡 머리뼈를 타고 화산의 수증기를 이용해 분화구로 높게 치솟아 올라왔는데 역시나 무사하게 착륙하고...하이라이트는 동굴 속에서는 안터지던 핸드폰이 수십마일 아래 땅 속에서는 터지는 기적이!
어차피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과학이 아닙니다. 영화는 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을 바탕으로 한 모험담을 이야기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니 3D 상영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빌린 것이구요. 최초의 디지털 3-D 작업으로 제작된 영화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영화는 '최초'라는 것이 그렇듯이 아직까지는 사람들이 3D 라는 말에 기대하는 만큼의 모습은 보여주지 못합니다. 일부 장면이 인상적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리얼D'의 경우는 안경으로 인해 화면이 너무 어두워진다는 단점도 있습니다.(디지털 3D 상영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3D 기술에 대한 아쉬움이 크기는 하지만, 영화는 그래도 그 3D 상영을 통한 흥미로움인한 경험적 측면에서는 재미를 제공합니다. 아직까지는 딱 거기까지만이라는 것이 안타깝지만요.
앞으로의 3D 상영 방식의 영화들은 분명 더 발전할 것이고, 또 언제가는 일반화가 될 것입니다. 북미의 극장주들이 그런 영화들을 원하고 있기에 계속 제작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동네도 극장 영화산업이 예전만 못하면서(특히나 그쪽은 DVD/블루레이의 등의 시장이 크기 때문에) 극장만의 차별화를 위한 무엇인가가 필요한데, 그것을 바로 3D 상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로버트 저매키스가 계속 퍼포먼스 캡쳐를 이용한 3D 영화를 만들고 있고, 제임스 카메론 역시 3D에 꽂혀서 "아바타"를 준비했습니다. 실사보다는 더 손쉬운(?) 3D 애니메이션에서는 드림웍스가 2009년 부터의 자사의 애니메이션들을 모두 3D 상영방식으로 제작하기로 했고, 픽사 역시 "Up"부터 3D 상영 방식으로 제작하고 나섰습니다.
영화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는 그 출발점 정도라는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가볍게 즐기면 되는 그런 영화입니다. 너무 큰 기대는 사치이구요.
로맨틱 코메디 "달콤한 거짓말"은 어쩌면 박진희의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녀가 이 영화를 살리고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이야기로만 치면 그냥 진부합니다.
여기에 서른을 곧 앞둔 한 여성 방송작가가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지호(박진희 분)입니다. 명색이 방송작가이긴 하지만, 그녀가 맡은 프로그램은 조기종영되기 일쑤고, 이번에 맡았던 프로그램도 애국가 시청륭에 밀리면서 그녀는 백수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우연히도 차 사고를 당하게 되는데, 차의 주인은 그녀가 10년전부터 짝사랑해오던 선배 오빠 강민우(이기우 분) 입니다. 그는 지호를 기억하지 못하고, 그때부터 지호는 기억상실인 것처럼 위장해 민우네 집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던 중, 지호와 어릴때부터 친구이자 옆집에 살던 동식(조한선 분)이 그녀를 알아보게 되면서 일은 점차 꼬이고, 그녀의 거짓말도 계속됩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지호 친구의 말처럼 'TV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다고 영화는 애초부터 지적될 수 있는 클리셰들을 인정합니다. 그것은 이미 감안하고 있다는 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그런 클리셰들의 전복이나 재조합을 유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뻔하디뻔한 클리셰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앞서 말한 이야기와 같이 진부하다라고만 볼 수 없는데에는 배우 박진희의 덕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슬랩스틱부터 다양한 얼굴 표정까지, 그녀는 웃음을 위해서 말그대로 최선을 다합니다. 발랄한 그녀의 매력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웃음이자 미덕입니다. 그에 비한다면 정작 그의 상대역인 두 남자 배우는 별다른 매력이 없습니다. 조한선은 미남이라는 이미지를 벗고자 추레한, 다분히 평범한 모습을 지속적으로 연기하는데, 그의 장점을 그런 역에서 찾아보기는 힘듭니다. 이기우는 말 그대로 뻔하고 평범한 역할이고 말입니다. 이 두 주연급 조연남자배우들보다는 차라리 그보다 비중은 적은 지호의 동생 역의 김동욱이나 카메오 출연 정도인 DOC의 정재용이 만들어낸 상황이나 대사가 재미를 주는데는데 더 도움이 되고, 그래서 눈에 띕니다. 다시 정정해보자면 박진희와 조연들의 영화라고 할까요.
"달콤한 거짓말"의 아쉬움은 클리셰들을 이용한 재해석이나 전복이 없이 다분히 클리셰들을 적당히 다지는데만 주력했다는 것입니다. 박진희라는 배우의 덕으로, 그리고 크게 보자면 감독의 연출로 그런 부분이 무난하게 넘어갔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떤 큰 훅이 없는 모습은 그저 평범하기만 한 로맨틱 코메디 물로 그치게 만듭니다. 하지만 평범한 로맨틱 코메디물도 제대로 못만드는 우리나라 영화계를 두고보면, 그렇게 평범해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입니다.
생각해보면 바즈 루어만의 모든 작품은 '멜로' 였습니다. 제목부터 "오스트레일리아"라고, 호주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붙여놓기는 했지만, 어쨋든 바즈 루어만의 신작도 멜로물입니다. 배경이 바뀌었고, 그리고 인물들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영화 "오스트레일리아"는 드넒디 넓은 호주를 배경으로 영국 귀족 여성 애쉴리와 한 몰이꾼의 사랑이 장엄한 역사라는 무대 앞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사랑 뿐만 아니라 휴머니즘과 용기와 희망, 감동이 있습니다.
영화는 애쉴리(니콜 키드먼 분)가 목장을 운영 중인 남편을 만나러 호주로 오게되면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만나게 된 인물은 거친 싸나이 냄새 물씬 풍기는 몰이꾼 '드로버' 잭 입니다. 드로버의 안내로 파러웨이 농장에 도착한 애쉴리는 그녀의 남편이 죽은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충격에 흔들리기도 잠시, 그녀는 남편이 하려했던, 다윈 시로 소 1500마리를 몰고가는 일을 수행해야합니다. 그 과정을 드로버가 돕는 것은 물론이요, 도중에서 둘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또 하나 빼먹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여정을 방해하는 악당의 존재입니다. 파러웨이 농장을 차지하려는, 그래서 호주 목축업을 쥐고 있는 카니(브라이언 브라운 분)를 돕는 닐 플레쳐(데이빗 웬햄 분)는 애쉴리 일행의 다윈 행을 저지하려 합니다. 이 부분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는 영화의 1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쉴리 일행의 다윈의로의 여정은 흔히 말하는 롤플레잉 식 전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극에서 흔히 나오는 그 구조. 악당 닐 플레쳐가 방해라는 퀘스트를 던져주면, 우리의 주인공들은 슬기롭게 그 퀘스트를 깨나가면서 레벨업을 해나갑니다. 그 와중에 특수능력도 얻게되지요. 1부가 다윈시에 무사히 도착한 애쉴리 일행으로 인해 카니의 호주 목축업에 대한 독점이 깨지면서 마무리가 되었다면, 2부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감동적 휴머니즘과 더불어 애쉴리와 드로버의 사랑이 강조될 차례입니다. 드로버는 퀘스트를 진행해오면서 '마님의 애인'이라는 지위로 인한 특수능력을 얻게 되었구요. 원주민 혼혈 아이를 찾아 헤매는 애쉴리의 절절함과 그런 애쉴리를 애타게 찾는 드로버의 사랑의 간절함을 일본군의 무차별적 폭격은 돕고 있습니다. 시련이 깊으면 그 후의 감동도 더한 법 아니겠습니까?
바즈 루어만은 이 영화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헐리우드 고전부터 서부극, "진주만"까지 폭 넒게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볼거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저것의 볼거리만으로 영화가 재밌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이야기를 굴려나가느냐가 문제인데 단순히 애쉴리와 드로버의 사랑 하나만으로 이 모든 것을 균형 있게, 조화롭게 구성되어 있다고 바라보기에는 큰 무리가 따릅니다. '멜로'가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었던 것은 '타이타닉'이 대서양에서 침몰하고, 잭과 로즈가 눈물로 생과 사의 이별을 하면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새로울 것 없는 드로버와 애쉴리의 사랑 이야기로는 이 거대한 이야기를 지탱하기는 무리가 큽니다. 바즈 루어만의 욕심이 과했습니다. 색다를 것은 없는 두 주인공 인물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을 연기한 배우들까지 색다를 것 없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휴 잭맨과 니콜 키드먼은 분명 그 역에 딱 들어맞는 훌륭한 연기를 했습니다. 그것까지 영화와 함께 빛을 잃을 필요는 없습니다. 니콜 키드먼은 이 영화의 흥행실패로 또 한차례 수모를 겪을테지만, 흥행 문제가 그녀의 연기에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영화가 그렇게 크게 흥미로운 점이 없다보니, 눈에 띄는 것은 의외의 다른 점입니다. 아니면, 영화가 애초에 그걸 의도했었던 것일 수도 있구요. "오스트레일리아"는 호주 출신의 감독과 배우들이 만난 작품이어서 그런지 호주의 아름다운 자연 광경을 긴 영화의 중간중간 한 텀 쉬어가는 휴식터로 자주 제공합니다. 자연스레 영화의 크레딧이 끝날 때 '호주관광청' 자막이 떠오르지 않아 내심 아쉬움이 들었던 것은 저 뿐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영화야 비록 그다지 재미가 없었을런지 몰라도, 관객에게 '호주 한번 가보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게 했으니, 바즈 루어만은 적어도 조국에 대한 애국은 한 셈 아닐까요?(...뭔 소리냐...)
P.S 영화의 1부와 본격적인 2부가 시작되기 직전, 무도회 장면. '드로버' 휴 잭맨이 깔끔하게 복장 갖추고, 면도하고 등장해 싱긋 미소를 짓는 순간, 저는 속으로 '제..제임스 본드!'라고 외쳐버렸습니다(-_-) 제임스 본드 역을 휴 잭맨이 맡았어도 다니엘 크레이그보다 더 잘하면 잘했지, 못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봅니다. 아우, 아까비...
사실 이런 영화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기는 개인적으로 조금 그렇습니다. 다분히 10대 소녀들의 로망에 기댄 영화를 20대 중반의 남자가 유치하느니 어쩌느니 하는게 우습거든요. "트와일라잇"은 전적으로 그 나이대의 소녀떼(?)들을 위한 영화입니다. 혹시나 모르겠는데, 아직 환상 속에 살고 계시는 20대 초반의 여성분들까지도 포함될지도 모르겠네요. 10대 소녀 취향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멀게는 "캔디 캔디"나 우리나라에서 귀여니 소설 원작으로 영화화된 "늑대의 유혹"과 비슷한 감성으로 읽혀질 수 있겠습니다. 뱀파이어물이라는 외형적 틀을 쓰고 있긴 하지만, 정서 자체는 순정만화 류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여주인공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이청아 보다 이쁘고, 남자주인공인 로버트 패틴슨이 강동원만큼 잘 생긴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되긴 하지만 말입니다.
영화는 엘리자베스 스완(크리스틴 스튜어트 분, 이하 벨라)이라는 소녀가 새로운 남자와 삶을 이룬 어머니의 짐이 되기 싫어 친아버지가 살고 있는 외진 마을로 오게 되면서 시작합니다. 이 소녀는 나름 당찬 느낌도 나고, 자기 말로는 자주 넘어지기도 한다고 합니다.(이런 캐릭터 참 흔하죠?) 전학을 온 학교에서 벨라는 눈깜짝할 사이에 친구들을 사귀고, 학교의 상황들을 파악하게 됩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이는 에드워드 컬렌이라는 (영화 상에서의 설정은) 잘 생긴 남학생입니다. 우산 속에서 샤방하게 등장하던 강동원 처럼 에드워드는 (하얗게 밀가루칠한 얼굴을 스크린 가득 채우며) 슬로우 모션으로 '나 멋있는 놈이다'를 강조하며 첫 등장을 알립니다. 벨라는 에드워드에게 점차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만, 그는 왠지 모르게 벨라를 까칠하게 대합니다. 그러던 얼마 후, 에드워드가 먼저 벨라에게 다가오게 되면서 둘은 가까워집니다. 그러면서 벨라는 에드워드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뱀파이어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순정만화 류의 감성이 뱀파이어물과 결합된 것에 다름이 아니기에 영화 상에서 표현되는 에드워드와 벨라의 사랑은 행동도 대사도 참 닭살 돋기 그지 없습니다. "스타워즈"에서 아나킨과 아미달라가 펼치던 초원에서의 러브모드를 봤을 때의 느낌보다 좀 더 하다고 할까요. 그런 사랑이다 보니 영화에서 에드워드가 뱀파이어라는 점은 벨라에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Power of Love' 일 뿐이지요. 그렇다보니 서로 다른 존재에서 올 수 있는 흥미, 이질적인 두 존재 사이에서 오는 극중의 긴장감은 그다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물론, 이 둘의 사랑을 훼방놓는 사악한 뱀파이어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은 말그대로 최소한의 액션/볼거리를 동반한 흥미거리를 주기 위한 것이지 결코 극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무엇일까요? 영화는 미국 고등학생들의 일종의 통과의례인 댄스파티를, 그곳에서의 사랑 확인을 최종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 상에서는 지속적으로 댄스파티를 향한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의 열망이 나타나는데, 이는 이 영화를 보는 그 나이대의 관객들이 영화 속 인물들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그래서 집중케 하는 효과를 냅니다. 감독 캐서린 하드윅은 그렇게 그 여자아이들의 마음을 붙잡아 놓습니다. 문제는 그 외의 이들에게는 그것은 별 관심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캐서린 하드윅의 연출은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데도 취약하고, 상황과 상황의 전환에서도 그리 매끄럽지 못합니다.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기에는 무리가 많이 따른다고 할까요.
차기작의 감독도 교체가 되었고 했다지만, 사실 후속작에 대해서는 별 기대가 안됩니다. 어차피 다음 작품이 어떻게 만들어지든간에 그 영화가 개봉하면 기를 쓰고 가서 볼 소녀떼들의 수요가 (적어도 미국에는)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그냥 누워서 떡먹는 격이니까요. 다만 헐리우드 '뱀파이어 로맨스' 물이라는 점에서 봤을때 괜시리 "렛 미 인"의 헐리우드 리메이크작이 더없이 걱정될 따름입니다.